1452년 5월 14일 문종은 경복궁의 강녕전에서 3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국장을 총괄할 총호사로 영의정 황보인을 임명하고, 산릉도감에는 김종서 · 정분 · 민신 · 이사철 · 이사임(李思任)을 제조로 임명하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도 적극 참여하였다.
5월 20일에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이 안치된 영릉(英陵)의 주변에서 능터를 찾는 간산이 이루어졌다. 세종이 헌릉 곁에 자신의 능을 미리 정했던 것처럼 문종도 영릉에 갈 때에 서쪽 산등성이에 말을 멈추고 풍수학 관원에게 좋은 혈인지 묻고 한참을 둘러보았다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5월 23일에 영릉의 근처 이목동(梨木洞)을 택하였으나, 구덩이를 파 보니 물이 솟았다. 다시 서쪽으로 정하여 파 보니, 돌이 나와 산릉으로 쓸 수 없었다. 결국 건원릉의 동남쪽 언덕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산릉의 터를 정하는 동안 노원리의 채석장에서 석실에 쓸 석재를 채취하여 영릉까지 옮겨왔으나, 능터가 건원릉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대형 석재를 건원릉까지 다시 옮겨야 하였다. 이때 덮개돌을 옮기는 데만 8천 명이 동원되었다고 전해지며, 한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9월 1일에 국장이 이루어졌다.
현릉은 본래 단릉(單陵)으로 조성되었으나, 1512년(중종 7)에 현덕왕후의 소릉(昭陵)을 동쪽으로 옮기면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 되었다. 현덕왕후는 1441년(세종 23)에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을 낳다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경기도 안산군에 묻혔다.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빈을 현덕왕후로 추숭하고 소릉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1457년(세조 3)에 단종복위사건으로 현덕왕후를 서인으로 강등하고, 소릉은 바닷가로 이장되었다. 1513년(중종 8)에 현덕왕후의 신분이 복위되면서 바닷가에 있던 소릉을 현릉 동쪽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조선 전기 왕릉에는 신도비를 세웠기 때문에 현릉을 건립할 때도 비석을 만들기 위해 충주에서 돌을 채취하여 준비하였으나, 논의 끝에 비석을 세우지 않도록 결정하였다. 이후로 조선왕릉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게 되었다.
문종의 현릉은 남향하여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현덕왕후릉은 동북쪽에서 남서쪽을 바라보는 인좌신향(寅坐申向)으로 문종릉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1452년에 건립된 왕릉은 석실로 만들었으나, 1513년에 건립한 왕후릉은 석회와 모래 · 황토를 섞어 만든 회격릉이다.
조선 전기 병풍석(屛風石)의 귓돌에 영저(靈杵)와 영탁(靈鐸)을 조각하였으나, 1446년(세종 28)에 영릉을 조성하면서 불교적 의미를 갖는 것이니 구름문양으로 대신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 국조오례의』에 반영되었다. 이를 따라 현릉의 병풍석에도 면석(面石)과 귓돌에 모두 구름문양이 조각되었다.
정자각은 문종릉과 현덕왕후릉 사이에 배치하되 좌향은 왕릉의 방향을 따라 자리 잡았으며, 왕과 왕후의 제향을 함께 모셨다. 정자각 남쪽에는 수라간(水剌間)과 수복방(守僕房)이 있었으나, 현재는 수복방 건물터만 확인된다.
세종 영릉을 만들면서 정립한 조선의 석실 제도는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었으나, 영릉이 천릉하면서 회격(灰隔)으로 재조성되고, 석실의 구조는 남아 있지 않다. 문종의 현릉은 『국조오례의』의 석실 제도를 반영하여 만든 유일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