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종(眞宗, 7191728)은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의 맏아들로 태어나, 1725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27년에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으나 이듬해 11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효장(孝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파주 순릉의 왼쪽에 세자묘의 격으로 장사를 지냈다.
효순왕후(孝純王后, 1715~1751)는 세자빈의 신분으로 1751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1728년에 효장세자의 왼쪽 곁을 비워 두었기 때문에 별도의 논의 없이 쌍분으로 안장되어 1752년에 완공하였다.
영조는 효장세자에게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를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즉위하는 1776년 3월 19일에 영조의 뜻에 따라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을 각각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숭하였다. 이때 묘를 영릉(永陵)으로 격상하였다.
1728년에 효장세자묘에는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長明燈)을 1좌씩 놓고, 문석인(文石人) · 호석(虎石) · 양석(羊石) · 석마(石馬)는 각 한쌍으로 수량을 반으로 줄이고, 무석인(武石人)은 세우지 않았다. 1752년에 효순현빈이 쌍분으로 안장될 때에는 혼유석만 설치하고 나머지 석상은 배치에 맞도록 옮겨 놓았다.
사후에 추존된 원종(元宗, 1580-1619)의 장릉(章陵)과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온릉(溫陵),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혜릉(惠陵) 등에서는 능으로 격상되면서 능제에 맞추어 석상을 추가하였으나, 영릉은 묘로 건립될 당시 그대로 유지되어 봉분에는 난간석(欄干石)이 없어 민묘처럼 보이며, 무석인 없이 문석인만 배치된 상태이다.
정자각(丁字閣)의 동쪽에는 두 채의 비각(碑刻)이 있다. 한 곳에는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의 묘소를 밝히는 표석이 있으며, 그 남쪽의 두 번째 비각에는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중하면서 세운 표석과 대한제국기에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로 추존하면서 세운 표석이 나란히 있다. 3기의 표석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재평가되어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진 상황이 담겨 있다.
조선 초에 정리된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기준으로 국가 의례를 행하지만, 시의(時宜)에 맞지 않은 어려움이 있어 1744년에 영조는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정리하였다. 그러나 효순현빈과 의소세손의 국상이 이어지면서 재정된 하교를 정리하여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수록하였다.
영조 대에 왕과 왕후의 능과 세자와 세자빈의 묘의 격식을 명확히 구분하는 과정에서 영릉이 건립되었으며, 『국조상례보편』 편찬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릉은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의 공릉(恭陵)과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의 순릉(順陵)과 같은 능역을 형성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 파주 삼릉’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