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릉(穆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조선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및 인목왕후 김씨의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이다. 1600년에 건원릉의 동쪽에 인목왕후의 유릉이 건립되고,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자 건원릉 서쪽에 산릉을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이 무너지는 문제가 생기자 1630년에 유릉의 서남쪽으로 천릉하였다. 이로써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역을 합하여 목릉이라 불렀으며, 1632년에 인목왕후가 선조의 능침 동남쪽에 안장되어 동원삼강릉이 되었다.
1600년에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가 승하하자 경기도 포천 신평에 터를 잡고 산릉(山陵: 국장을 하기 전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새 능) 공역을 시작하였다. 터가 불길하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터를 다시 정하여 건원릉(健元陵)의 동쪽에 산릉을 건립하고 능의 이름은 유릉(裕陵)이라 하였다.
1608년에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가 승하하여 건원릉의 서쪽에 산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목릉이라 하였다. 조성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병풍석(屛風石)이 무너지고 기울어지는 문제가 계속되었다. 1630년에 원주목사(原州牧使) 심명세(沈命世)가 상소를 올려 천릉(遷陵)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천릉의 터로 정한 곳이 의인왕후의 능 서남쪽으로 오늘날 선조의 목릉이 자리한 곳이다.
의인왕후 유릉 곁에 선조의 목릉이 들어서자 능의 이름을 합쳐 목릉이라 부르고 정자각(丁字閣)을 하나로 합하였다. 1632년에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승하하자 선조의 능침(陵寢) 동남쪽에 안장하고 혜릉(惠陵)이라 불렀는데, 영역이 같으므로 세 능을 합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목릉은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세 능침이 하나의 영역에 각각의 언덕으로 조성된 곳이다. 광릉의 전례를 따라 한 골짜기에 왕과 왕후의 능침이 언덕을 달리하여 형성되면, 능침의 중심축에 정자각을 합하여 세우고 제례를 지내도록 정하였다.
그 규례에 따라 선조의 능침 앞에 정자각을 정전(正殿: 제향 음식을 차려놓고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공간) 3칸에 배위청(拜位廳: 제관들이 서 있는 기둥만 있는 공간) 2칸으로 세우고,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의 능침에서 신로(神路)를 연결하여 한곳에서 제례를 지내도록 하였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과 능침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단릉에 비교하면 목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향어로(香御路)와 정자각에서 각 능침까지 이르는 신로가 구불구불 부정형으로 연결되어 특징적이다.
선조 · 의인왕후 · 인목왕후의 지하 구조는 석회와 모래 · 황토를 섞어 회격현궁(灰隔玄宮)으로 조성하고, 회격(灰隔) 바깥면에 숯을 다져 쌓은 탄격(炭隔)으로 둘러쌌다. 선조의 봉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난간석(欄干石: 봉분 주위에 돌로 두른 난간)을 둘렀으나, 두 왕후의 봉릉은 난간석만 둘렀다.
목릉이 만들어진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기존의 기록이 모두 소실된 상태에서 의인왕후의 유릉을 건립하면서 조선 후기 회격릉을 형성하는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
정자각은 유지 보수의 과정이 있었으나, 1630년에 선조의 능을 천릉할 때 조성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 중에서 다포(多包) 형식을 갖춘 유일한 사례이며, 포작(包作: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의 살미와 구조가 장식적으로 변화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가치를 인정 받아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