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8년 9월 8일에 세조가 수강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세조가 죽음을 앞두고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마련하지 말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간에 왕릉은 당연히 석실로 지어 왔으며, 석실이 없다면 부장품을 넣을 곳이 없으니, 석실을 폐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종은 세조의 명을 준행함으로써 산릉 공역으로 생기는 백성의 폐해를 줄이겠다고 결정하였다.
산릉 터는 풍양에 있던 정흠지의 무덤 영역으로 정하고, 예종이 직접 간산에 참여하여 지형을 확인하였다. 기존 묘역을 이장하기 위하여 자손들에게 필요한 물품과 일꾼을 내려 주는 것으로 공역이 시작되어 11월 28일에 국장이 이루어졌다.
1483년 3월 30일에 정희왕후가 온양행궁에서 승하하였다. 왕후의 능은 광릉의 동쪽에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자리 잡았으며, 6월 12일에 국장을 행하였다. 같은 골짜기에 두 개의 능이 각각의 언덕에 조성되는 동원이강릉의 첫 번째 사례였다.
1471년에 광릉을 조성한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봉분이 무너졌다. 원인은 사대석을 사용하지 않은 것과 능 안쪽에 삼물회를 과다히 높이 쌓아서 잔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해결책으로 능을 넓히고 흙을 두텁게 덮어서 사초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지형의 경사를 높여서 물이 잘 흐르도록 하였다.
1483년에 정희왕후의 능이 동쪽에 자리 잡으면서 동원이강릉을 이루었으며, 삼년상을 마친 1485년 3월 30일에 정자각을 가운데로 옮겨 세워, 왕과 왕후의 제향 공간을 합하였다. 1754년에 표석을 세우고 비각을 갖추었다. 1962년에 광릉 주변 산림이 크낙새서식지로 지정되었으며, 1999년에 국립수목원을 건립하였다.
서쪽에는 세조의 능침이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배치되고, 동쪽에는 정희왕후의 능침이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V’ 자 형태를 보인다. 두 축이 만나는 곳에 정자각이 있다.
왕과 왕후의 현궁은 회격으로 만들었으며, 봉릉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을 둘렀다. 왕후의 난간석에 동자주에는 십이지상이 세겨져 있어 특징적이다. 병풍석의 면석에 십이지신을 조각하여 방향을 상징한 것을 병풍석을 생략하면서 난간석 동자주에 표현한 것이다.
광릉의 정자각은 본래 8칸에 팔작지붕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총 5칸 규모이다. 정자각 뒤쪽으로 28보 위치에 망료위가 있으며, 서북쪽으로 27보 위치에 비각을 갖추어 표석이 서 있다. 정자각의 남쪽으로 270보 자리에 홍살문이 있다.
광릉은 조선왕릉이 석실릉에서 회격릉으로 전환되는 사례이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주자가례』를 따라 회격으로 현궁을 조성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유언을 계기로 석회와 모래 · 황토를 비율에 따라 섞어 반죽하여 회격릉을 만드는 첫 시도를 하였다. 또 왕과 왕후의 능이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되면서 가정자각 제도를 정립하게 되었다. 광릉의 8칸 규모의 정자각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정자각이 8칸으로 건립되는 전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