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9월 28일 황태자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가 승하하자 용마산 내동(內洞)에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원소(園所)를 정하고 유강원(裕康園)이라 하였다. 10월 17일부터 공역을 시작하여 11월 29일에 예식을 갖추어 장사를 치렀다.
원(園)의 격으로 조성하되, 제향 공간은 정자각(丁字閣) 대신 침전(寢殿)으로 조성하고 내부에 닫집을 놓아 대한제국기의 특징이 보인다. 1907년에 순종(純宗, 18741926, 재위 19071910)이 왕위에 오르자, 황후로 승격되면서 유릉으로 격상하였다.
1926년 4월 25일에 순종이 승하하자 5월 5일에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이 묻힌 홍릉(洪陵)의 좌측 언덕에 봉표하고 7일부터 산릉의 공역을 시작하였다. 이때 홍릉의 예를 따라 순명효황후의 능침을 옮겨 합장하도록 하였다. 황후의 재궁을 옮겨와 6월 5일에 새 유릉에 안장하고, 6월 11일에 순종의 국장이 이루어졌다.
1926년에 유릉의 현궁(玄宮)을 만들 때 가운데 순종의 현궁를 마련하고 동쪽에 순명효황후의 현궁을 배치하였으며, 서쪽은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의 자리를 예비하여 3실로 구성하였다. 1966년 2월 13일에 순정효황후가 승하하여 비워 둔 서쪽 실에 합장되니, 하나의 봉분 아래 3기의 실을 갖춘 동봉삼실(同封三室)의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1926년 순명효황후의 능이 천릉하고 난 빈자리에 1929년에 골프장이 들어섰다가 1972년에 어린이대공원이 조성되었다. 현재 서울어린이대공원 입구 근처에 유경원에 있던 돌거리가 남아 있으며 2001년에 ‘순명비유강원석물’이라는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유릉은 홍릉의 예를 따라 황제릉으로 조성하였다. 능상에는 합장하여 하나의 봉분이 있으며,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으로 치장하였다. 세 분의 합장릉이지만 혼유석(魂遊石)은 하나만 두었으며, 좌우에 망주석(望柱石)과 장명등(長明燈)을 세웠으나 이외의 석상은 침전 앞에 배치되었다.
침전은 정면 5칸에 측면 4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으로 조성되었다. 침전 내부에는 닫집을 두었는데, 홍릉의 것보다 규모가 크다. 침전 월대 정면에는 세 개의 계단을 두고 홍살문까지 얇고 넓적한 돌을 깐 길이 연결되었다.
길 좌우에는 문석인(文石人) · 무석인(武石人) · 기린 · 코끼리 · 사자 · 해치 · 낙타 · 말 순서로 석상이 마주 보도록 한 쌍씩 배치되었으며, 석마(石馬)는 두 쌍이 배치되었다. 홍살문 앞에는 재실(齋室)이 있는데, 재실에서 침전의 동쪽 계단까지 향어로가 조성되었다.
유릉은 홍릉과 함께 대한제국기에 황제릉으로 조성되어 조선왕릉의 전례와 차별된 사례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본격화된 시기에 건립되어 돌거리 공사에 일본 조각가 아이바 히코지로〔相羽彦次郞〕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사실적인 형태로 조각되었다. 1927년 『동아일보』에 일본 조각가의 참여로 인해 조선왕릉의 조각 수법이 행해지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기사가 발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