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12월 8일에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능호를 예릉이라 정하였다. 산릉의 터는 세 번의 간심을 거쳐 희릉(禧陵)의 오른쪽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결정하였다.
이곳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의 초장지(初葬地)로 옛 정릉(靖陵)의 터이다. 산릉 공역을 시작하여 터를 닦는데, 근처에서 병풍석(屛風石)과 면석(面石) 등이 노출되고 정자각(丁字閣) 터에서는 회다짐이 나왔다. 1864년 1월에 공역을 시작하여 4월 7일에 국장 의례를 행하고 10일에 완공되었다.
1878년 5월 12일 창경궁 양화당에서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1878)가 승하하자 능호를 헌릉(憲陵)으로 정하였다. 5월 18일에 예릉의 국내를 초간심한 결과 예릉 언덕의 대왕릉 왼편에 합부하기로 정하여 능호를 그대로 예릉이라 하였다. 6월 19일에 채석을 시작으로 공역이 시작되었으며, 9월 18일에 국장을 행하고 22일에 공역이 완료되었다.
대왕릉이 자리잡은 곳에 왕후의 능침을 쌍릉으로 조성한 것이므로 능상의 돌거리는 혼유석(魂遊石)과 난간석(欄干石)만 추가로 설치하였다. 가정자각(假丁字閣)을 지었다가 삼년상을 마치고 철거를 하였으며, 본래 있던 정자각을 수리 후 합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예릉은 1544년에 조성되었던 중종의 초장지에 자리를 잡으면서 능상의 돌거리를 재사용하여 돌공사를 줄였다. 조선 전기에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의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기면서 옛 돌거리를 땅에 묻었는데, 정릉을 옮길 때에도 영릉의 전례를 따라 돌거리를 땅에 묻었다.
묻어 두었던 정릉의 돌거리가 잘 남아 있어 양석(羊石) 3좌, 호석(虎石) 4좌, 석마(石馬) 2좌, 혼유석 1좌, 족석(足石) 4좌, 망주석(望柱石) 대좌 2좌, 문석인(文石人) 2좌, 무석인(武石人) 2좌를 재사용하게 되었다.
예릉은 19세기에 건립되었으나, 돌거리는 16세기의 모습을 갖고 있어 크기가 장대하고 육중하다. 1800년에 건릉(健陵)을 시작으로 19세기의 문석인은 금관조복(金冠朝服)으로 조각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나, 예릉의 문석인은 1544년의 모습대로 복두야대(幞頭也帶)를 착용한 모습이다.
조선왕릉의 능상에는 계체석(階砌石)으로 경계를 두어 상 · 중 · 하 3단으로 구성하였으나, 경릉(景陵)과 예릉에는 상 · 하로 2단으로 구성하여 상단에는 곡담, 호석과 양석, 봉릉, 혼유석과 망주석이 배치되고, 하단에는 장명등을 중앙에 놓고 양쪽에 문무석인과 석마가 마주보게 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