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의왕후는 1696년에 훗날 경종이 되는 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1720년 승하해 묘소는 세자빈의 예(禮)로 건립되었다. 능지는 현재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의 숭릉(崇陵)과 휘릉(徽陵) 사이의 유좌묘향(酉坐卯向)이었다.
단의빈묘 조성 시 석물(石物) 수량은 순회세자묘(順懷世子墓), 소현세자묘(昭顯世子墓)를 따르고, 석물의 크기는 정종(定宗, 13571419, 재위 13981400) 후릉(厚陵)과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 명릉(明陵)을 따르게 하였다. 그래서 단의빈묘는 무석인(武石人)이 없으며, 석물의 규모도 작게 건립되었다.
경종이 즉위 후 단의왕후 혜릉으로 추봉되었으며, 2년이 지난 1722년에서야 석물 추배설(追排設)이 되었다. 이때는 봉분 주변에 난간석(欄干石)을 두르고, 무석인 1쌍, 석마(石馬) 1쌍, 망주석 1쌍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양석(羊石)과 호석(虎石)도 1쌍씩 추가로 제작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혜릉 석물들은 1718년의 작품과 1722년의 작품이 혼재되어 있다.
단의왕후 혜릉은 세자 혹은 세자빈으로 묘역이 조성된 뒤 추봉 된 조선왕릉 중 처음으로 무석인 등 왕릉에 맞게 석물이 추배설된 사례이다. 더불어 가장 먼저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석물의 크기는 작지만, 무석인의 갑옷과 투구, 망주석의 호랑이문양 등의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곳이다. 더불어 세자빈묘로 조성된 1718년, 혜릉으로 추배설된 1722년, 1747년 표석 건립의 정황이나 작품이 자세히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