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릉은 조선왕릉 중 옛 왕릉 돌거리를 처음으로 재사용한 사례이다. 현종(顯宗, 16411674, 재위 16591674)의 승하 당시 1673년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 영릉(寧陵)을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에서 여주 영릉과 영릉(驪州 英陵과 寧陵)으로 천릉하였으며,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 영릉(英陵)을 여주에 조성하였다.
이처럼 경제적인 부담이 커지자 명성왕후(明聖王后) 청풍김씨(淸風金氏, 1642~1683)의 명으로 동구릉에 묻어 둔 옛 영릉[舊寧陵, 1659년] 돌거리를 발굴해 재사용하였다. 옛 영릉 돌거리 중 상돌, 장명등(長明燈), 석인상(石人像) 등 일부 손상된 부분은 고쳐서 다시 사용하였다.
1674년 현종 숭릉 조영 당시 명성왕후의 명으로 왼쪽을 비워 두는 허좌(虛左)의 자리로 능지를 마련해 두었으며, 명성왕후가 1683년 10월 승하하자 1684년 4월에 안장하였다.
숭릉은 능강 위에 현종과 명성왕후의 쌍릉에 난간석(欄干石)이 둘러져 있으며, 양석(羊石), 호석(虎石), 망주석(望柱石), 상돌, 장명등,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석마(石馬) 등의 돌거리가 설치되어 있다. 능강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 비각(碑刻), 홍살문, 연못 등이 남아 있다.
숭릉 정자각은 팔작지붕의 8칸 건물로서 ‘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왕릉에 팔작지붕 정자각은 세조 광릉 등 몇 곳이 있었지만, 여러 차례 개수를 통해 변개(變改)되어 현재 숭릉 정자각만 팔작지붕 형태이다. 또 정자각은 대체로 정전(正殿) 3칸, 배위청(拜位廳) 3칸의 총 6칸이지만, 숭릉 정자각은 정전 4칸, 배위청 4칸의 총 8칸으로 매우 드문 형태이다.
숭릉은 조선왕릉 중 돌거리 재사용의 첫 사례로, 옛 영릉 돌거리와 새로 제작된 숭릉 돌거리가 함께 남아 있으며, 정자각의 원형이 잘 유지되어 연구 가치가 높다. 현재 구리 동구릉 내에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