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는 1670년(현종 11)에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어 1674년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의 즉위로 왕비가 되었다. 1680년(숙종 6)에 천연두 증세를 보이더니 10월 26일에 경덕궁의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이튿날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을 총호사(總護使)로 삼고, 박신규 · 이익상 · 여성제 등을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로 임명하였다.
11월 초부터 산릉의 터를 정하기 위한 간산(看山)의 절차가 이루어졌으며, 후보지로 숭릉(崇陵)의 왼쪽 언덕과 경릉(敬陵)의 오른쪽 언덕이 유력하였으며, 건원릉(健元陵)과 순릉(順陵) · 창릉(昌陵) 등 여러 곳이 거론되었다.
11월 15일에 숙종은 경릉의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최종 결정을 하였다. 익릉의 건립은 1674년 숭릉의 전례를 따라 공역이 이루어졌다. 국상이 10월 말에 일어났으므로 겨울에 산릉의 공역이 행해졌으나, 국장 의례는 땅이 녹기를 기다려 다음 해(1681년) 2월 22일에 이루어졌다.
능상의 제도는 영릉(英陵)의 예를 따라 병풍석(屛風石)과 사대석(莎臺石)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을 둘렀다. 능상은 3단으로 구성하여 계체석(階砌石)으로 경계를 두었는데, 하계에는 계체석을 생략하였다. 상계에는 봉릉과 곡담, 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등이 있으며, 중계에는 8각의 장명등(長明燈)과 문석인(文石人)이 있다. 하계에는 무석인(武石人)이 좌우에 마주 보고 서 있다.
숭릉의 전례를 따라 정자각(丁字閣)은 8칸 규모로 짓고, 재실(齋室)의 안향청은 온돌 2칸에 마루 4칸으로 구성하여 총 6칸이며, 집사청은 온돌 4칸, 마루 2칸, 중문 1칸으로 총 7칸 규모이며, 참봉청은 전퇴를 포함하여 12칸 반 규모였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정자각의 좌우에는 수라간(水剌間)과 수복방(守僕房)이 각 3칸으로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어로는 지형을 따라 계단이 만들어진 것이 특색이다.
익릉은 1674년 숭릉의 전례를 따르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의 특징을 반영한 곳이다. 궁궐의 빈전에서 발인하여 산릉에 도착한 재궁을 국장하기 전까지 봉안하는 영악전(靈幄殿)이라는 임시 전각을 건립하지 않고 정자각을 활용하되, 정자각의 규모는 정전 3칸에 좌우 익각을 갖추어 5칸으로 하고 배위청을 3칸으로 하여 총 8칸 규모로 건립하여 규모를 확대하였다.
8칸 정자각의 전례는 조선 초기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광릉(光陵)의 정자각에서 참고하였으며, 이때 지붕은 팔작지붕이었다. 그러나 익릉의 8칸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익각부에 풍판(風板)을 달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여 추녀와 서까래가 썩는 것을 예방하였다.
조선 후기에 8칸 정자각이 건립된 곳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 영릉(寧陵)과 현종(顯宗, 16411674, 재위 16591674)의 숭릉이며, 8칸 규모에 맞배지붕으로 조성된 사례는 익릉에서 시작되어 휘릉(徽陵), 명릉(明陵), 의릉(懿陵)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특색을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