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8년(숙종 14) 8월 26일에 장렬왕후가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세상을 떠났다. 9월 초5일부터 산릉의 터를 모색하여 파주 장릉(長陵), 순릉(順陵)의 경내, 고양의 희릉(禧陵)과 익릉(翼陵)의 경내 등이 거론되었으며, 남양주 광릉(光陵)과 건원릉(健元陵) 경내까지 추가로 간심하였다.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의 하교에 따라 건원릉 국내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자리를 간심하니, 경주부윤 신경윤(愼景尹)이 “국가 제일의 능침”이라 극찬하여 9월 22일에 최종 결정되었다. 12월 초6일에 현궁(玄宮)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12월 16일에 국장이 이루어졌다.
1762년에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가 휘릉(徽陵)을 봉심하니 정자각의 기둥 밑이 썩은 것을 발견하고 수리하도록 명하였으며, 1793년(정조 17)에 다시 한번 수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897년에는 5월 20일 새벽에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정자각이 소실되자, 중건청(重建廳)을 설치하여 새로 건립하였다.
중건청 제조였던 조정희(趙定熙)가 정자각의 규모가 일반적으로 5칸인데, 휘릉은 이보다 많다고 아뢰니,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이 답하기를 “각 능의 정자각은 5칸이지만, 숭릉(崇陵)과 휘릉만은 정전(正殿)의 좌우에 반 칸의 퇴가 있고 배위청(配位廳)에도 1칸이 더 있어 8칸 규모이니, 본래 규모대로 중건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중건한 8칸 정자각이 현재까지 유지되었다.
현궁은 석회와 모래 · 황토를 비율대로 섞어 반죽하여 회격(灰隔)으로 만들었다. 봉릉에는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 둘렀다. 능상은 계체석(階砌石)을 놓아 단을 구분하였으며, 후면에는 곡담으로 감쌌다.
상계(上階)에는 봉분이 있고 주위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을 각 4개씩 교차하여 배치하고, 정면에는 혼유석을 중심에 두고 양쪽에 망주석을 세웠다. 중계(中階)에는 장명등을 중심에 두고 문석인(文石人)과 석마(石馬)를 1쌍씩 마주 보도록 배치하고, 하계(下階)에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石馬) 1쌍씩을 배치하였으나, 하계의 경계를 이루는 계체석은 생략하였다.
1788년에 기록된 『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정자각 오른쪽으로 28보 지점에 수라청(水刺廳)이 있으며 왼쪽으로 28보 지점에 수복방(守僕房)이 있다고 하였으나, 모두 소실되었고 수복방의 기단과 초석만 남아 있다.
정자각은 정전 3칸에 좌우 익각(廙閣)을 갖추어 5칸이며, 배위청은 3칸으로 총 8칸 규모이다.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정자각 제도를 5칸으로 규정하면서 이후의 정자각은 5칸으로 획일화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8칸 규모의 정자각이 꾸준히 건립되었고, 1674년 숭릉을 건립하면서 조선 후기에도 8칸 정자각이 재등장하였다. 그러나 지붕의 추녀부가 쉽게 썩어 보수하는 과정에서 6칸 혹은 5칸으로 변화되어 그 사례가 많지 않다. 휘릉은 8칸 규모에 맞배지붕으로 건립된 정자각의 사례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