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희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충청남도관찰사,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한 관료.
이칭
이칭
정섭(定燮)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5년(헌종 11)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양주(楊州)
정의
대한제국기 충청남도관찰사,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본관은 양주(楊州). 본명은 조정섭(趙定燮). 조휘림(趙徽林)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3년(철종 14) 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집례(執禮)를 지냈다. 그 뒤 1869년(고종 6) 동지 겸 사은사행(冬至兼謝恩使行) 때 정사 이승보(李承輔)·부사 조영하(趙寧夏) 등을 수행하여 서장관장령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1872년 이조참의, 1880년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그런데 1883년 이천부사 재임 당시 강원도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에 의해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885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1886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전 정언 권봉희(權鳳熙)가 상소하여, 조정희의 집안은 대대로 총애를 받아 재상반열에 두루 있었으나, 조정희는 행실이 패악하고 탐욕스러워 나라의 화란(禍亂)을 즐겨하고 근거없는 소리를 만들어내므로 처벌해야 한다고 청하여, 9월에 귀양갔다가 2개월 후에 특별히 방면되었다.

1890년 이후 이조참판·사간원대사간·사헌부대사헌 등을 지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성립된 뒤에는, 이전에 임명되었던 내무나 언관 쪽의 관직보다는 주로 왕실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광무개혁 가운데에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였던 궁전의 역사(役事)·사전(祀典)을 담당하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1896년 봉상시제조(奉常寺提調)를 출발점으로 하여, 1897년 휘릉정자각중건청당상(徽陵丁字閣重建廳堂上), 1899년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로서 각 능의 개수역사(改修役事)에 참여하였다.

1899년 장례원경·궁내부진관·경모궁제조(景慕宮提調)·경모전제조(景慕殿提調), 1900년 태의원경(太醫院卿)·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 1901년 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 1902년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충청남도 관찰사 재직 당시에는 결세(結稅)의 징수가 미진하였기 때문에 1개월 감봉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지돈녕원사(知敦寧院事)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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