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릉은 1648년 상돌의 네 귀퉁이, 무석인(武石人) 2기, 문석인(文石人) 1기의 코가 깨진 것이 발견되었다. 북한산 중흥동(重興洞)에 부석소(浮石所)를 설치하고, 다른 왕릉을 봉심(奉審)한 결과 성종 선릉(宣陵) 석마(石馬)의 코가 부러져 유회(油灰)로 붙여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깨진 돌거리를 다시 제작하지 않고 고쳐 사용하였다.
문석인, 무석인은 전체를 깎아 내고 다시 새겼는데, 원래의 복식(服飾) 형태를 그대로 반영하여 15세기의 복식에 16세기의 얼굴이 조각된 독특한 작품이 되었다. 이러한 석역(石役)을 성공적으로 끝낸 석수(石手) 도편수 조말룡(曺末龍)은 인조(仁祖)의 명에 의해 영직(影職)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었다.
순릉은 난간을 두른 봉분 주변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이 배치되어 있으며, 곡담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상돌, 장명등, 망주석(望柱石), 문석인, 무석인,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강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刻), 홍살문이 있으며, 수라간(水剌間)과 수복방(守僕房), 재실(齋室) 등은 남아 있지 않다.
공혜왕후 순릉은 1474년에 조영되었으며, 1648년 석인상(石人像)의 코 등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때 돌거리를 새로 제작하지 않고 전체를 깎아서 다시 조각하는 방법을 채택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 인해 15세기 복식과 17세기 얼굴이 공존하는 독특한 작품이 탄생하였다. 또한 이 일로 석수 조말룡은 영직 통정대부에 제수되고 이후 많은 여러 작품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적 파주 삼릉(坡州 三陵)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