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왕의 무덤을 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전국 시대(戰國時代)부터로 추정되며, 한(漢) 고조(高祖, 유방)의 능을 장릉(長陵)으로 칭한 것으로 미루어 한나라 때부터 별도의 능호(陵號)를 올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박혁거세가 사릉(蛇陵)에 안장되었다고 하지만 사릉이 능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고려 이전에는 별도의 능호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 이전의 왕릉은 ‘누구의 능’ 식으로 그 명칭이 정해지고 있다. 더불어 피장자가 밝혀진 경우, 신분에 따라서 능, 묘 등의 명칭이 붙여지지만, 피장자를 특정할 수 없을 경우 일반적으로 고분(古墳)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총(塚)으로 부르기도 한다.
왕릉은 산릉(山陵)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산릉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북위(北魏)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에서는 “진(秦)에서 천자의 무덤을 ‘산(山)’이라고 불렀으며, 한(漢)에서는 ‘능(陵)’으로 불렀으므로 통칭해 ‘산릉(山陵)’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무덤으로서 원(園)이라는 명칭은 『한서(漢書)』에 선제원릉침묘(先帝園陵寢廟)로 등장했지만 뚜렷하게 어떠한 신분의 무덤을 칭하기보다는 능역의 넓은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송(宋)에서 영종(英宗)의 생부(生父) 묘소를 복원(濮園), 효종(孝宗)의 생부 묘소를 수원(秀園)이라고 했으나 정례화되지는 않았다.
능원의 구분이 제도화되는 것은 청(淸)나라의 일로, 황제의 아들인 친왕(親王)과 친왕의 세자(世子), 군왕(郡王), 공주(公主), 종실(宗室), 패륵(貝勒), 패자(貝子), 진국공(鎭國公), 보국공(輔國公), 진국장군(鎭國將軍), 보국장군(輔國將軍)의 묘소를 원침(園寢)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원은 조선 후기에 발생하는데 1626년 인조(仁祖)의 생부 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의 묘소를 흥경원(興慶園), 생모 연주 부부인(連珠府夫人) 구씨의 묘소를 육경원(毓慶園)이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1632년 정원 대원군이 원종(元宗)으로 추존되면서 흥경원은 장릉(長陵)으로 높여지고, 연주 부부인이 인헌왕후로 추존되어 합장하면서 조선 최초의 원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1753년 영조가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묘소를 소령원(昭寧園)으로 높이면서 원은 조선 왕실의 고유한 능원 제도로 정착되었다.
고구려의 고분은 역대 도읍 주변으로 조성되어 중국 집안현 통구 압록강 중상류 유역, 평양 대동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227년에 산상왕(山上王)을 “산상의 능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산상왕이라 하였다. [葬於山上陵, 號爲山上王.]”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능’이라는 명칭과 장지(葬地)를 국왕의 시호처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동천왕(東川王)은 시원(柴原), 중천왕(中川王)은 중천의 언덕[中川之原], 서천왕(西川王)은 서천의 언덕[西川之原], 미천왕(美川王)은 미천의 언덕[美川之原]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은 축조 방식에 따라 돌무지무덤(積石塚), 봉토무덤(封土墳)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돌방〔石室〕 내부의 벽화(壁畵)가 있는 곳을 벽화분(壁畵墳)이라고 한다.
백제의 고분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역대 도읍 주변에 조성되어 있어서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백제의 왕릉 조영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1971년 공주 송산리에서 무령왕릉(武寧王陵)이 발견되면서 백제 왕릉의 조영 과정, 형태, 부장품 등과 관련된 사실들이 밝혀졌다.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을 통해서 무령왕은 만 2년 3개월, 왕비는 2년 4개월만에 안장(安葬)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능 대신 대묘(大墓)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지신(地神)에게 땅을 구입한 매지권(買地券)이 발견되어 백제 왕릉 조영의 단면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 고분 중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곳으로 3천여 점의 출토품은 백제 미술의 진수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중국과 활발히 교류한 모습도 보여 준다.
백제 고분은 돌무지무덤, 널무덤, 벽돌무덤, 돌방무덤, 독무덤 등이 있다. 돌방부덤은 한성, 웅진, 사비 시대에 걸쳐 건립되었다.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웅진 시대에 건립되었으며,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 두 기가 있다. 부여 능산리 1호분은 돌방무덤으로 돌방 내부에 사신도(四神圖)를 그려 넣기도 했다.
신라는 도읍이 경주 한 곳뿐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고분은 경주와 그 주변에 분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이 사망하자 사릉(蛇陵)에 장사지냈으며, 그 이후 제2대 남해차차웅, 제3대 유리이사금, 제5대 파사이사금을 이 사릉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추이사금은 대릉(大陵), 법흥왕과 진흥왕은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 진평왕은 한지(漢只), 선덕왕은 낭산(狼山), 진덕왕은 사량부(沙粱部)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경주 시내에 분포하고 있는 대형 고분인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塚〕은 신라의 대표적인 고분 형태이다. 이러한 덧널 내에 관, 부장품을 넣은 뒤 덧널 위에 돌을 쌓은 뒤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형태의 고분은 신라만의 특징이다.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황남대총은 남북 길이 120m, 동서 길이 80m의 규모로 신라 최대의 고분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5만 7천여 점의 유물을 통해 신라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왕릉은 경주 주변에 분포되어 있으며,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뀌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상당수 통일신라 때의 왕릉 위치가 기록되어 있으며, 신도비(神道碑) 등의 금석문이 발견되면서 피장자가 밝혀진 곳이 여러 곳 있다. 대표적으로 태종 무열왕릉, 성덕왕릉, 경덕왕릉, 원성왕릉, 흥덕왕릉이 피장자가 명확한 통일신라 왕릉이다.
통일신라의 왕릉에서는 기존 고분에서 건립되지 않았던 석물(石物)들이 발견되었다. 봉분 주변을 두르는 호석(護石)과 난간(欄干), 봉분 앞의 상석(床石), 봉분 주변의 사자상(獅子像), 신도(神道)의 석인상(石人像)과 석주(石柱), 신도비 등이다. 이러한 석물들이 대부분 갖추어진 왕릉은 성덕왕릉, 원성왕릉, 흥덕왕릉 등이다.
통일신라 왕릉 석물은 특히 당(唐)의 능묘(陵墓) 제도의 영향이 커서 비석, 사자, 석인상 등의 배치 및 석인상의 복식, 사자상의 형태 등이 매우 닮아 있다. 반면에 통일신라의 독자적인 석조물로는 호석과 난간석, 상석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특히 호석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고 주변에 난간석을 두르는데, 이러한 호석과 난간석은 중국 묘제에서 찾을 수 없는 고유한 모습이다. 이 호석과 난간석은 고려시대에 12면(面)으로 변화된 뒤 조선까지 계승되는 우리나라 능묘 미술의 특징이다.
고려는 왕릉과 왕후릉을 합쳐 총 60기가 조영되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강화도에도 고려 왕릉이 있다. 고려 왕릉이 60기가 조영되었지만 현재 28기만이 피장자와 위치 등이 명확히 확인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이미 고려 왕릉 중 주인을 알 수 없는 곳이 많아지는데 이로 인해 조선 왕릉에 표석(表石)이 건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통일신라의 왕릉이 비교적 평지에 조성되었다면 고려의 왕릉은 비교적 비탈진 능선에 자리잡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고려 왕릉은 대체로 3단으로 조영되어 있다. 고려 왕릉의 최상단에는 봉분이 있고, 그 주변에 병풍석(屛風石), 난간석, 석양(石羊), 석호(石虎)가 있다. 봉분 앞에는 망주석(望柱石), 상석이 놓여 있다. 두 번째 단의 중앙에는 장명등(長明燈), 양옆에 문석인(文石人)이 있으며, 세 번째 단에도 석인상이 건립되어 있다. 가장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 형태의 건물터가 있어서 제각(祭閣)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왕릉은 전체 규모 면에서 통일신라 왕릉에 비해 작아졌다. 고려 왕릉의 내부는 관곽을 넣은 현실(玄室)이 석실(石室)로 조성되어 있으며, 사방의 벽과 천장에 회(灰)를 바르고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천장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 벽에는 사신(四神)을 그리기도 했다. 다만 공민왕 현릉(玄陵) 등 일부 왕릉을 제외하면 석단(石壇)이나 기타 석물들의 치석(治石) 수법이 정연하지 못하고, 조형적으로 우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민왕 현릉 석실의 벽에는 구름 위에 문관 복식의 십이지신상을 그렸으며, 관(冠)에 십이지신에 해당하는 동물의 머리를 그려 넣기도 했다.
고려 왕릉은 대부분이 도굴되었지만 일부 왕릉에서는 부장품 일부가 확인되었다. 인종(仁宗) 장릉(長陵)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래되는 1146년(황통 6년(皇統六年))명 인종 시책(諡冊), 청자과형병(靑磁瓜形甁, 국보) 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시대 왕릉에는 숙위군을 배치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능묘를 수리하거나 보호 구역을 정해 보호하였다. 1818년에는 피장자가 확실한 고려 왕릉 30기에 표석을 건립하기도 했다. 현재 북한 지역에 있는 고려 왕릉은 국보 유적, 보존급 유적, 남한 지역에 있는 고려 왕릉은 사적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조선 왕릉은 27대 왕과 왕후릉 및 추존 왕릉 포함 총 44기이며, 모두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왕릉은 북한인 황해도에 신의왕후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 후릉이 있으며, 강원도 영월의 단종 장릉을 제외한 41기의 왕릉이 서울 및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왕릉의 제도는, 개국 초에 공민왕 현릉을 계승해 신덕왕후 정릉 등을 건립했으며, 세종 대에 불교적 제의(祭儀)와 문양 등을 배제해 『세종실록』 「오례의(五禮儀)」에 최초로 제도화되었다. 1474년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반포되면서 조선 왕릉 제도가 완비되는데 앞서 『세종실록』 「오례의」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국조오례의』 반포 이후 조선 왕릉이 모두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라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다양하게 변형해 조성됐다. 18세기에는 왕릉 석물의 규모를 줄이는 왕릉 석물 간소화가 진행되는데 이를 반영해 1758년에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편찬했다.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서 보이는 조선 왕릉 제도 중 가장 큰 차이점은 관을 안치하는 공간을 석실(石室) 혹은 회격(灰隔)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조선은 고려를 계승해 15세기까지 석실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국조오례의』에서 제도화되었다. 세조는 유교(遺敎)로 석실 대신 회격을 사용하게 하는데, 이로 인해 1468년에 조성된 세조 광릉(光陵)은 조선 왕릉 최초로 회격이 조영되었다. 더불어 세조 광릉은 봉분 주변을 두르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는데 회격 사용과 병풍석 제거는 왕실에서부터 검소한 덕을 밝히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이후 왕릉에 영향을 미쳤다.
세조 때 없앤 왕릉 석물 중 하나가 신도비(神道碑)이다. 조선 왕릉은 건국 초부터 신도비를 건립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유정난 때 이미 완공된 문종 현릉 신도비가 폐기되고, 세조는 왕의 기록이 국사에 남아 있다고 신도비 건립을 하지 않았으며, 세종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신도비가 매장되었다. 이후 왕릉에는 비석을 건립하지 않는 전통이 200여 년간 지속되다가 1673년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효종 영릉에 간단한 능표(陵表) 건립을 시작하고, 1724년 숙종 명릉 조성 시 능표 건립을 제도화한 이후 왕릉 조영 때 능표도 함께 건립되었다. 이전 왕릉 중 표석이 없는 곳은 영조, 정조 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세우기도 했다.
조선 왕릉은 약 4개월의 국장 기간 내에 조성되는데, 이는 능지(陵地)를 찾고, 땅을 능역에 맞게 정비하고, 건축물과 석조물을 제작하기에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4개월 내에 이러한 큰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왕릉을 건설하는 산릉도감(山陵都監)에 삼물소(三物所), 조성소(造成所), 노야소(爐冶所), 대부석소(大浮石所), 보토소(補土所), 소부석소(小浮石所), 수석소(輸石所) 등 7개소와 별공작(別工作), 분장흥고(分長興庫), 번와소(燔瓦所) 등이 체계적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의 석물과 건축물을 성격별로 구분해 보면 석실과 회격이 가장 중요하고, 그 위에 조영하는 봉분과 병풍석과 난간, 곡장(曲墻) 등 봉분 시설이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병풍석은 조선 전기에 다수 건립되지만 조선 후기에는 점차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화되어 난간만을 두르게 된다. 봉분과 곡장 사이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조각해 외호(外護)하게 한다.
망주석(望柱石)은 본래 명칭이 전죽석(錢竹石)으로, 소전대(燒錢臺)와 함께 제의(祭儀) 석물이었으나 조선시대에 관련 제의가 사라지면서 소전대는 폐지되고, 전죽석은 망주석으로 이름을 바꾸어 존치된다.
조선 왕릉의 상석(床石)은 실제 제향을 올리지는 않지만 전체 왕릉에 건립되어 있다. 제향을 올리지 않아 혼유석(魂遊石)으로 혼동되기도 하지만 상석이 올바른 명칭이다. 상석 앞에 건립되는 장명등(長明燈)은 왕릉에 시신을 안치한 뒤 소상(小祥) 때까지 조석상식(朝夕上食) 때 등불을 켜는 제의 석물이다. 장명등은 평면 형태에 따라 8각은 17세기까지, 4각은 18세기 이후 집중 제작되었다.
의장(儀仗) 석물의 대표적인 작품은 석인상(石人像)으로, 왕릉에는 문석인(文石人)과 무석인(武石人)이 각기 건립되고, 이를 따르는 석마(石馬)도 건립되었다. 문석인은 복두공복상(幞頭公服像)이 대부분이며, 정조 건릉 이후부터 금관조복상(金冠朝服像)이 건립되었다. 무석인의 갑주(甲冑) 형태는 시기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조선 왕릉의 건축물은 대부분 제향(祭享) 시설로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자각이다. 가로 형태의 공간이 정전(正殿)으로 실제 제향이 이루어지며, 정전 앞에 길게 나온 부분은 배위청(拜位廳)으로 제향 시의 예비 공간이다. 이밖에도 수라간(水刺間), 수복방(守僕房), 홍살문(紅箭門),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재실(齋室) 등의 건축물이 있다.
조선 왕릉은 전체 44기가 완전하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료(史料)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왕릉 조영 시 작성한 『산릉도감의궤』와 관리 목적으로 편찬된 각종 등록류(謄錄類), 능지(陵誌) 등을 통해 왕릉 조영부터 관리까지 파악할 수 있다. 더욱이 왕릉 조영에 소요된 비용이나 참여한 장인(匠人) 목록 등은 조선시대 경제, 문화사 복원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2009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시대 원(園)은 능(陵)과 묘(墓) 사이의 특수한 체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후기에만 나타나는 고유한 제도이다. 조선시대 원은 인조(仁祖)가 사친(私親) 묘소의 추봉(追封)을 위해 마련한 제도였는데 이를 적극 활용한 것은 영조(英祖)였다. 영조는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소를 1753년 소령원(昭寧園)으로 봉원(封園)한 뒤, 1755년에는 인빈 김씨(仁嬪金氏) 묘를 순강원(順康園)으로 봉원했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사친(私親)인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수은묘(垂恩墓)를 1776년 장헌 세자(莊獻世子)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다. 1789년 양주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기도 했다. 또한 정조는 효장 세자(孝章世子)에게 입후(立後)되어 왕위에 올랐는데, 이에 효장 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했다. 이후 진종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묘를 수길원(綏吉園)으로 높이기도 했다.
이처럼 대체로 조선시대 원은 처음에 묘로 조성되었다가 원으로 높여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1870년에는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순회묘(順懷墓)를 순창원(順昌園), 소현세자 소현묘를 소경원(昭慶園), 소현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민회묘를 영회원(永懷園), 의소 세손 의소묘를 의령원(懿寧園), 문효 세자 효창묘를 효창원(孝昌園)으로 높였다. 1899년에는 장헌 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숭됨에 따라 그 사친 영빈 이씨 선희묘(宣禧墓)가 수경원(綏慶園)으로 높여지기도 했다.
사후 바로 원으로 조영된 사례는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인명원(仁明園)과 수빈 박씨의 휘경원(徽慶園)이 있다. 원빈 홍씨의 오빠인 홍국영이 축출되면서 묘소로 강등되었다. 고종 후궁 순헌 귀비의 영휘원(永徽園)과 영친왕의 아들의 숭인원(崇仁園) 등도 처음부터 원으로 조영되었다.
이렇게 조선시대 원은 대부분 묘소로 조영된 뒤 원으로 높여지는 것으로 원의 체제상 특별함은 없다. 다만 소령원, 순강원, 수경원은 석마, 석호, 석양이 추가 배설되었으며, 다른 원들은 비석을 새로 건립하거나 추각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원으로 조영된 수빈 박씨 휘경원의 사례를 보면 봉분 주변에 석양과 석호 1쌍을 배치하고 봉분 앞에 석상과 장명등, 좌우로 망주석, 문석인, 석마를 1쌍 건립해 왕릉의 체제와 유사하지만 석양, 석호의 수를 반으로 줄인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