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원(仁明園)은 1781년(정조 5)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사후에 내린 무덤의 이름이다. 인명원은 동부 온수동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홍국영이 죽은 이후, 궁원의 호칭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따라, 원빈묘(元嬪墓)로 강등되었다.
궁원의 호칭을 받은 원빈 홍씨(元嬪洪氏)의 예제상의 지위는 그녀의 오빠인 홍국영(洪國榮)의 권세에 좌우될 수 있었다. 그런데 홍국영이 퇴진하고 김종수(金鐘秀)의 탄핵 등으로 위기에 몰렸던 그녀가 1781년에 사망하자, 그 이듬해 6월에 좌승지 서유방(徐有防)이 인명원의 ‘원(園)’ 자를 없앨 것을 건의하였다. 첨지 정술조(鄭述祚)도 소를 올려, 순회·소현묘도 원이라 하지 않고 묘라 했는데 빈어의 무덤을 원이라 한 것은 고례(古例)가 아니라며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정조는 그동안 이러한 요청을 묵살해 오다가, 1786년(정조 10) 11월 11일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진달로 이를 수용하였다. 김치인은 저군(儲君)의 위호도 칭원(稱園)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예외의 의절을 창설한 것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조는 인명원의 원호를 강등하는 등의 의절을 예조에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3일 뒤에 김 영빈방(金寧嬪房)의 예에 근거하여 인명원과 효휘궁의 호를 혁파하고 정자각과 홍살문을 훼철하며 비석을 고쳐서 새기고 석호(石虎) 및 수봉관이 구처하는 절목을 없애도록 하였다. 그중에서 정자각은 배위청을 없애고 정당은 그대로 제청으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궁원의 호가 혁파됨으로써, 인명원은 원빈묘(元嬪墓)로 강등되었다.
원빈 홍씨(1766~1779)는 정조의 후궁으로, 호조참판 홍낙춘(洪樂春)의 딸이며 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 정전에서 가례를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1779년 5월 7일에 14세의 나이로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졸하였다. 이때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宮號)를 효휘(孝徽), 원호(園號)를 인명(仁明)이라 올렸다. 정조는 원빈의 행장을 직접 지었는데, 그것이 장서각 소장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이다.
원빈의 상장례는 예장으로 치러졌다. 인명원은 흥인문을 나가 관왕묘를 거쳐서 도착할 수 있는 동부 온수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조성되었다. 그곳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의 고려대학교 경내이다. 현재는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 권역의 후궁 묘역에 이장되어 있다.
궁원이 묘묘(墓廟)로 강등되자, 궁방(宮房)이나 절수(折受) 등에 의한 재원의 확보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제사 등에 대한 조처는 사당의 삭망분향을 중관이 전례대로 하고, 속절 및 시향, 묘소의 기제 및 속절은 거행하되, 제수 준비는 별도로 논의해 정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