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식단 ()

영월 장릉 배식단 전경
영월 장릉 배식단 전경
조선시대사
유적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조선후기 장릉(莊陵)에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제단.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조선후기 장릉(莊陵)에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제단.
개설

배식단은 장릉(莊陵)의 정단과 별단에 배식한 268위의 제단이다. 단종이 복위된 이후, 1791년(정조 15)에 처음으로 정위 32인과 별단의 제위 198인을 지정하였다. 이 배식자 숫자는 그 후 순조 연간 이래 추가되어 268위로 증가하였다. 제사의 시일은 한식 때이며, 그 축문은 정조가 직접 지었다. 제단은 정단과 별단을 구분하였으며, 별단은 공로의 다소와 신분에 따라 셋으로 나누었다.

역사적 변천

숙종 대에 단종이 복위된 이후, 영조는 단종 관련 사적을 정비하고 계유정난의 피화자인 삼상(三相)을 비롯해 궁인들까지 현창 대상을 확대시켰다. 그 과정에서 삼상 등에게는 ‘충(忠)’ 자의 시호를 내렸다.

정조는 이러한 선왕들의 사업을 계승하여, 1791년(정조 15) 2월, 경기도 유생 황묵(黃默) 등의 상언을 계기로 화의군(和義君)과 금성대군(錦城大君) 외의 많은 사람들을 함께 창절사(彰節祠)에 추배할 것을 논의토록 하였다. 그에 따라 실록 등을 상고하여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고, 제단 제도 등을 결정하였다.

배식자 명단은 같은 달 21일에 발표했는데, 정단에 배식된 사람은 32인, 별단에 배식된 사람은 사적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 8인과 연좌되어 죽은 사람 190인 합 198인이었다. 그리고 축문은 정조가 직접 지었으며, 이는 3월 3일의 제사에 처음 사용되었다. 그리고 단종제신의 사적을 정리하고 확정한 『장릉사보(莊陵史補)』가 1796년(정조 20)에 완성되었으나, 간행되지 못하였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자, 왕권의 확립 차원에서 단종제신의 사적에 다시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포장의 추가와 은거한 제신의 발굴을 통한 포장이 이루어졌다. 이때 정효전과 이종검 등의 포장이 이루어졌다. 1802년(순조 2)에 『장릉사보』를 선사하기는 하였으나 역시 간행되지 않았고, 1807년(순조 7)에 영월부사 박규순(朴奎淳)이 『장릉지속편』을 찬진하여 간행이 허락되었다. 그 후 『장릉사보』는 내용을 추가하여 1914년에 사적으로 간행되었다.

내용

배식단의 제단은 달천(㺚川)의 실례를 모방하되, 당시에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사판(祠版)으로 만들어, 장릉의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한식(寒食)에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호가 없는 성승(成勝)과 박계우(朴季愚)는 시호를 내리고, 독동(禿同)과 윤생(尹生)은 증직하도록 하였다.

별단(別壇)은 공로의 크고 작은 차이를 구별하여 육종영(六宗英)·사의척(四懿戚)·삼상신(三相臣)·삼중신(三重臣)·양운검(兩雲劒) 및 육신(六臣)과 육신의 아비와 자식 중에 특별한 사람,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 등 문경공(文敬公)·문헌공(文獻公)의 아들과 손자로서 더욱 뛰어난 사람,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도진무(都鎭務) 정효전(鄭孝全) 같은 사람들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축문을 짓도록 하였다.

육종영은 안평대군·금성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이양 등 여섯 종실을 가리키고, 사의척은 송현수·권자신·정종·권완 등 네 외척이며, 삼상신은 김종서·황보인·정분 등 세 재상을 말한다. 삼중신은 민신·조극관·김문기이며, 양운검은 성승과 박쟁(朴崝)이다. 문경공은 허조, 문헌공은 박연이다.

별단의 설치는 충민단(忠愍壇) 등처럼 담장은 함께 하면서 제지(祭地)는 달리 한 형태로 하고, 사적이 자세하지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8인과 연좌되어 죽은 김승규(金承珪) 등 1백 90인을 별단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증참판 엄흥도(嚴興道)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고, 고 처사(處士) 김시습과 태학생 남효온(南孝溫)도 똑같이 창절사에 추가로 제향하도록 하였다.

32인의 제단의 사판(祠版)은 ‘충신지위(忠臣之位)’라고 쓰고, 별단은 사판 3개를 만들어 계유년·병자년·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각각 쓰도록 하였다. 계유는 계유정난, 병자는 1456년(세조 2) 사육신 등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 정축은 1457년(세조 3)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영월로 유배하고 얼마 후 사약을 내려 죽인 사건이 각각 발생된 해이다.

의의와 평가

사육신과 단종을 추복한 숙종과 이를 확대하여 김종서·황보인·정발 등 삼상(三相)을 추복한 영조의 뜻을 계술하여 『장릉사보』를 편찬하고 배식단을 설치한 정조의 정치적 의도를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홍재전서(弘齋全書)』
「19세기 ‘단종제신’ 포장과 사적 정비」(윤정, 『사학연구』98, 2010)
「조선후기 단종 복위와 충신 현창」(이현진, 『사학연구』98, 2010)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임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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