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대에 정원군에게 처음으로 시행한 적이 있는 궁원제는 영조대에 와서 확립되었다. 효제의 정치논리를 내세운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왕위 계승과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효제의 실천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친인 숙빈최씨의 추숭 작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다가 1753년(영조 29)에 사당과 무덤을 궁원(宮園)으로 격상시키고 식례를 제정함으로써, 궁원의(宮園儀)는 국가의 전례로 제도화되었다.
원제(園制)는 인조대에 정원군(定遠君)에게 처음으로 시행한 전례가 있었다. 당시에 신흠(申欽)은 “한대 이후에 원릉(園陵), 원침(園寢)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원(園)은 능(陵)의 이명(異名)으로 능 아래와 묘위에 따로 별도의 원이라는 단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바 있다. 또 오광운(吳光運)이 언급한 바와 같이, 원릉·원침이라는 용어는 곧 왕 혹은 황제의 능침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동안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원(園)의 용례에 비추어보면, 원제는 사실 후궁 출신의 국왕 사친에게 적용될 수 있는 예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영조는 이를 사친 추숭의 시행을 정당화할 수 있는 변례로 이용하였다. 영조는 즉위하면서 탕평정치를 표방하며 효제(孝悌)를 내세웠는데, 이는 군부일체(君父一體)의 정국운영논리였다. 효제를 실천함으로써 얻게 되는 정치적 실리는 왕권과 왕실의 안정 및 유지였다. 효제의 정치논리로 사친 추숭을 단행하는 가운데, 사친의 공적 지위를 격상시켜 주는 전례의 근거로 궁원제를 원용한 것이다. 이 칭궁 칭원(稱宮稱園)은 『육상궁상시책(毓祥宮上諡冊)』에서, 중국 주나라의 고사를 모방하고 조선의 전장(典章)을 준수한 것이라 하였다.
영조는 1753년(영조 29)에 사친인 숙빈최씨의 사당과 무덤을 육상궁(毓祥宮)과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시켰다. 『대전통편』에 따르면, 봉원지례(封園之禮)가 처음 시행된 것이 영조 계유년이라 하였다. 계유년은 바로 1753년이다. 사친의 묘(墓)를 원(園)으로 개봉하는 예는 이때에 국가의례의 차원에서 최초로 시행한 것이다. 따라서 묘묘(廟墓)의 궁원으로의 격상에 따른 제 의식 및 절차는 식례로 규정되었다.
그리하여 『궁원식례』와 『궁원식례보편』, 『육상궁소령원식례』가 차례로 편찬되고, 정조 즉위년에는 『궁원의』가 편찬되었다. 아울러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이를 수록함으로써 궁원제는 국가의 전례로 제도화하였다. 이 식례의 편찬은 영조의 사친에 대한 효제가 국가의 법적 제도적 의례로 공식화되었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군신 간의 질서 체계는 더욱 확고해져 왕실의 안정된 기반을 마련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영조의 사친 추숭 노력은 결과적으로 왕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육상궁은 더 이상 사묘(私廟)라 칭해지지 않았으며, 거의 동시에 인빈김씨의 사당과 무덤이 궁원으로 봉해져 저경궁(儲慶宮)과 순강원(順康園)이라 칭하였다. 효장묘도 칭궁하였다. 동시에 각각의 식례가 제정되어 공식화함으로써, 국가의례에 편입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과 1778년(정조 2)에는 사도세자의 묘인 수은묘(垂恩墓)가 영우원(永祐園)으로 봉원되었고, 효장세자 모친의 묘묘(廟墓)도 연호궁(延祜宮)과 수길원(綏吉園)으로 봉해졌다.
궁원제를 통해 후궁 출신의 국왕 사친과 세자의 의례 상의 지위가 상승되고 국가의례로 편입됨으로써, 왕실은 이전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왕권의 정통성 확립과 왕실의 안정된 기반 구축 및 계승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