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당은 종묘 내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1395년(태조 4) 종묘 준공 때에 공신당도 5칸짜리로 세워졌다. 배향 공신은 국왕이 승하한 직후에 대신들의 논의를 거쳐 선정되어 배부(配祔)되었다. 정부에서는 위판을 조성하여, 본가에서 교서 선독과 제주, 치제를 차례로 행한 다음, 위판을 국왕 부묘 때 봉안하였다.
종묘의 담 밖에 있던 당은 1410년(태종 10)에 담 안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에 중건 증축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1778년(정조 2)에 또 한 차례 증축이 이루어졌다. 현재 공신당의 배향공신은 83위이다.
종묘 준공의 실록 기사에는 공신당 5칸이라 하였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의 도설에는 3칸으로 되어 있으며,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종묘의궤(宗廟儀軌)』 등의 그림에도 모두 3칸이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또 4칸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도설 상의 칸수는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되는 듯하다.
그런데 1410년(태종 10) 5월의 실록 기사를 보면, 태종이 종묘의 담 바깥 서남쪽의 모퉁이에 있는 빈 당을 보고서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묻자, 만세 후에 공신을 배향할 당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태종은 건물이 소략하면서 향배의 동서도 분변할 수 없으며 묘정과의 거리도 멀어 불편하다고 지적함에 따라, 담 안의 동계(東階) 아래로 옮겼다. 바로 남신문의 오른쪽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신당은 비어있는 상태였다가 태조 부묘 때인 1410년(태종 10) 7월에 처음으로 배향공신 의안대군(宜安大君) 등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따라서 초기 공신당의 위치는 종묘의 담 밖이었는데, 그것은 묘정에 배향하는 신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432년(세종 14) 6월에 박연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다시 이설을 건의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 삼등공신은 공신당에 앉아서 흠향하지 못하고, 그 위패를 내다가 3줄을 만들어서 악현의 동쪽, 공신당 문의 서쪽에 설위하게 된다. 이때 제집사의 배례하는 위치와 신위가 서로 아주 가까워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는 문제점과 함께, 헌가(軒架) 진설의 불편함, 제사 때에만 묘정에 설치하는 유공지신(有功之臣)으로 묘정의 배향 신하가 아니라는 점, 묘정에 배향할 필요가 없다는 점 등으로 묘정 밖으로 옮길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는 세종의 동의를 받았지만, 결국 이 결정은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공신당의 변천에 관한 기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1608년(광해군 즉위) 5월 종묘의 중건을 낙성했을 때, 공신당도 새로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처음으로 증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78년(정조 2), 배향의식 전에 당우(堂宇)의 간가(間架)가 부족하여 증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