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은 사람의 사체를 매장한 시설물이다. 묘·분묘라고도 한다. 사체를 땅에 묻어 처리하는 시설이며, 인간적 지성과 감성이 결합되면서 기념적 형상물로 발전했다. 동양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무덤 흔적이 나타난다. 무덤을 유택이라 하여 사자가 저승에서 사는 집이라는 생각이 자리하면서 무덤을 지키고 가꾸는 조형과 조경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무덤의 형식도 다양해졌다. 우리나라는 선사시대의 지석묘, 삼국시대 중기까지 이어진 순장 풍습, 고려 초기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풍수도참사상이 특징을 이룬다. 명당을 찾는 풍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더러 ‘말무덤’이니 ‘개무덤’이니 하여 특별한 동물의 무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은 한 특례일 뿐이고 무덤이란 역시 사람의 매장시설이다.
무덤은 어원적으로 볼 때 ‘묻다[埋]’라는 동사의 어간 ‘묻’에 명사화 접미어 ‘엄’이 맞춤법의 규정에 따라 ‘무덤’으로 표기된 것으로서 ‘죽[死]+엄’이 ‘주검’으로 표기되는 것과 같은 예이다.
무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 기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개 두 가지로 집약된다. 그 하나는 사체의 처리물이라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기념적 형상물이라는 관점이다.
사람이 죽으면 며칠 사이에 부패하기 시작하여 악취가 풍기고 보기에 흉측하므로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처리방법의 하나로 무덤이 생겼다는 것이 전자의 견해이다.
사체 처리의 방법은 생활환경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체를 바위나 나무 위에 얹어놓음으로써 금수에게 처치를 맡기는 풍장(風葬), 강변이나 해변에서 물속에 가라앉힘으로써 물고기에게 처치를 맡기는 수장(水葬), 열대지방에서 급속히 진행되는 사체의 부패에 대처하기 위하여 화장을 하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무덤은 그러한 사체 처리의 한 방법으로서 땅을 파고 묻어버리는 매장의 결과로 생긴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공동생활의 일원이 죽으면 슬픈 감정이 우러나고 그리운 정이 생기므로 사자 대신에 그를 추모할 어떤 기념적 형체로서 무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후자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 두 견해 사이에는 시간적 선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물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시대는 단순한 사체 처리의 한 방법으로서 무덤을 만들다가 차차 인간적 지성과 감성이 열리게 되면서부터 단순한 사체 처리에 어떤 기념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사체 매장으로 무덤을 만들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전기 구석기시대도 이런 풍습이 행해졌으리라고 추측은 되지만,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동양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그 흔적이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 북경(北京) 부근의 주구점(周口店) 상정동유적(上頂洞遺蹟)은 약 1만8000년 전의 것인데 1933∼1934년의 조사 때 7인분의 화석 인골이 동구(洞口) 상실(上室)의 지하 제4층에서 석기 · 골각기 · 동물의 뼈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것이 동양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무덤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인간들은 생활공간의 한 구석을 간단히 파고 사체를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그 형태나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로 갈라지는데, 이것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봉분의 형태에 따른 분류: 방형분(方形墳) · 원형분 · 전방후원분.
② 봉분의 재료에 따른 분류: 토장묘(土葬墓) · 지석묘(支石墓) · 적석총(積石塚) · 석총 · 토총 · 전축분(塼築墳).
③ 유구(遺構)의 재료에 따른 분류: 석관묘 ·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 목관묘 · 목곽묘 · 옹관묘 · 도관묘(陶棺墓) 등과 같이 세 가지 유형에 15가지 정도의 종류로 갈라진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속속 발견 · 조사되고 있으나 이 시기의 매장 흔적이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소박한 매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무덤은 100기 정도에 이른다. 종류는 토광묘 · 옹관묘 · 집단묘 · 동굴묘 등인데, 토광묘가 양적으로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다. 토광묘는 타원형이나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내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단순한 형태이다. 근래에 48기의 무덤이 발굴된 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이 대표적 사례이다. 옹관묘는 신석기 초기부터 나타나 중기까지 확인되는 형태이다. 기원전 5000년 무렵에 조성된 부산 동삼동 패총(東三洞 貝塚)의 최하층에서 발견된 옹관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밖에 진주 상촌리 유적의 옹관묘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빗살무늬토기를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화장된 인골 편이 함께 출토되어 신석기시대에 이미 화장 풍습이 존재했음을 알려 준다.
중국의 신석기시대 앙소문화기(仰韶文化期)의 반파유적(半坡遺蹟)에서는 집단 매장된 무덤에서 토장과 옹관 등이 확인되었고 용산문화기(龍山文化期)에 속하는 무덤도 발견되었다. 일본의 경우도 둥근 모양의 토장이 발견되고 있어 사체 매장에 의한 무덤의 조성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 무덤의 형태도 다양화하고 무덤 조성에 들인 정성도 깊어져서 당시의 문화와 역사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무덤은 전통적인 토장묘 이외 중국의 황하유역에서 발달한 토광묘[土壙墓, 토갱묘(土坑墓)] 등 토총계통과 지석묘 · 석관묘 · 석곽묘 · 적석총 등 석총 계통까지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이후 우리나라의 무덤의 변천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기에는 토장묘 · 토광묘 · 지석묘 · 석곽묘 등이 있었다. 토장묘는 가장 먼저 발달한 무덤의 형태로서 상호 영향 없이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토장묘는 가장 전통적이며 기초적인 무덤의 형태이지만, 두드러진 특징이 없기 때문에 주거유적과 혼동되는 수도 있다. 토광묘는 중원(中原)지방의 전통적인 무덤형식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시기는 대개 청동기 중엽인 듯 하다. 대동강유역에 가장 많이 밀집분포되어 있고, 다음으로는 낙동강 하류유역에서 최근에 많이 발견되고, 그 밖에 영산강과 한강유역에서도 더러 나타나고 있다. 이 토광묘는 그 형식을 세분하면 순수토광묘 · 목곽토광묘 · 석개토광묘 등으로 갈라진다.
순수토광묘는 깊이 1m 내외의 광을 길이 2m, 너비 1m 정도로 파고 벽면을 다듬은 다음 목관이나 사체를 넣고 세형동검 · 철제대도 · 한동경(漢銅鏡) · 철제거여구 · 칠기 등을 부장하는 무덤형식이다. 간혹 명문이 있는 칠기, 인장(印章) 등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과 시기를 밝혀주기도 한다.
목곽토광묘는 토광을 약간 크고 깊게 파고서 바닥에 목재를 깔고 벽면을 쌓아서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사체를 안장하는 형식인데 위로 통하게 된다.
여기서 발견되는 부장 유물은 앞의 순수 토광묘와 비슷하나 청동기보다 철기류가 더 많은 것이 특징이다. 목곽토광묘 중 토광벽과 목곽벽 사이에 자갈이나 기와쪽을 채운 것이 소수 발견되기도 한다.
석개토광묘는 순수토광묘에 판상석(板狀石)으로 뚜껑을 덮은 형식이다. 대동강유역의 토광묘는 대개 평지성 구릉에 조성되고 방대형(方臺形)의 분구(墳丘)를 가지고 있다. 최근 부산 · 김해 등지 및 경주에서 발견된 토광묘는 대개 목곽토광묘로서 대동강유역의 그것과 대차가 없는 구조이다.
다만, 경주의 경우 후한대(後漢代)의 동경이 자주 보이고, 의창 다호리의 목곽토광묘에서는 대형의 구유식[刳拔式] 목관과 다량의 칠기가 나왔고, 화순 대곡리의 토광묘에서는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이 나와 지역적 특징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들 토광묘는 원래는 분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평지화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토광묘는 무덤의 규모나 부장물로 보아 당시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가장 독특하고 전통적인 무덤형식이다. 그 구조는 지상에 커다란 돌을 괴어 올려놓은 것인데 분구를 따로 만들지 않으므로 우리의 무덤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거리가 있다.
지석묘의 분포는 함경북도의 일부지역과 울릉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과 연근해의 섬에 이르기까지 고루 퍼져 있다. 중국에도 우리나라와 가까운 절강성(浙江省) · 복건성(福建省) · 산동성(山東省) 등 동지나 연안지방과 요녕성(遼寧省) · 길림성(吉林省), 특히 요동반도에 분포되어 있고, 일본의 구주(九州)지방에도 적지 않은 수의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에는 탁자형(卓子形) · 기반형(碁盤形) · 변형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탁자형은 지상에 장방형의 네 벽을 세우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어놓은 형식으로 매장주체시설이 지상 석실에 해당되는데, 규모가 큰 것은 석실을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나누어 다수의 사체를 합장한 것도 있다. 기반형은 바둑판모양으로 몇 개의 돌을 괴고 그 위에 웃돌을 올려놓은 형식으로 매장주체시설은 지하에 마련된다.
변형은 지표에는 웃돌만 있고 모든 시설은 지하에 마련하는 형식이다. 탁자형은 한반도 북부와 요녕지방에 많고 기반형은 한반도의 남부지방에 많으며 일본의 것도 대개 기반형이다. 변형 역시 남부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지석묘가 있는 지형은 파주 옥석리 지석묘처럼 산능선 위에 있는 예외 말고는 대부분 하천이나 해변의 평지 또는 약간 높은 대지가 많고 대개는 무리를 이루는데 수십, 수백 개가 일직선 또는 원형으로 배치된 경우도 있다.
지석묘의 부장 유물로는 무문토기의 조각, 화살촉 · 돌칼 · 돌도끼 · 가락바퀴 등 마제석기 외 아주 드물게 곡옥 · 관옥 · 청동기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지석묘의 웃돌을 젖히고 보면 내부의 크기가 두 개 가량 되는 것도 있으나 1m 내외의 것이 대부분이다.
이로 미루어 굴신장(屈身葬)이나 2차장(二次葬)이 많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동양 삼국 중 지석묘가 가장 많아 지석묘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나 그 기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석관묘 역시 토광묘처럼 지표에 분구가 없어진 평지 그대로이다. 석관묘의 구조는 지하 1m쯤을 파고 구들장 같은 판상석 여러 장을 세워서 석관모양을 만들어 사체를 안장한다. 그러나 벽의 일부를 막돌이나 깬돌로 쌓기도 하고 바위가 있을 때는 그것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석관묘는 시베리아 남부 예니세이강 상류인 미누신스크지방에서 기원하여 요녕 · 길림 지방을 지나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중국의 동북부지방에도 함께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압록강 · 두만강 유역에서부터 제주도까지 한반도 전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어 대체로 지석묘 분포지역과 겹친다.
석관묘 중 특이한 구조를 가진 예로는 논산 신기리, 대구 진천동에서처럼 석관의 한쪽 끝에 별도로 된 소형 석실이 딸린 것도 있고, 만주 길림성에서처럼 석관을 이중으로 겹친 것도 있다. 석관은 사체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발 쪽보다 약간 넓고 높게 되어 있다.
석관묘의 소재 지형은 부여 가증리 · 중정리에서처럼 산의 능선 위나 정상부에 축조된 예외도 있으나 대개는 지석묘의 경우처럼 평지 또는 약간 높은 곳이 많다. 부장유물도 지석묘와 비슷하다. 예외로 부여 송국리에서는 요녕식동검, 대형 관옥이 발견되었다.
이 묘는 부장물도 월등할 뿐 아니라 개석이 지석묘의 웃돌처럼 크고 두꺼워서 마치 탁자식 지석묘를 지하에 가라앉힌 것같이 규모가 큰 점으로 미루어 당시 지배층의 무덤으로 간주된다.
석곽묘는 원시석실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대지(臺地)나 구릉 위에 지하 1.5m 이상 깊게 토광을 판 다음 바닥에는 돌을 깔고 천장은 나무로 덮고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올린다.
이런 석곽묘는 중국의 요녕지방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부여 연화리 등 금강유역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이런 석곽묘의 가장 큰 특징은 세형동검을 비롯하여 의식용으로 보이는 검파형(劍把形) · 방패형 · 원개형(圓蓋形) · 나팔형 등 가지가지 형태의 청동기가 출토된 점이다.
따라서, 석곽묘는 석관묘에서 보이는 청동기문화와는 그 계통을 약간 달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돌을 이용한 무덤 중 적석총은 지면 위에 막돌을 쌓아올린 돌무더기와 같은 형태이다. 그 본격적인 예는 요동반도의 누상(樓上) 강산(崗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돌무더기 속에 여러 개의 매장주체시설을 마련한 것이다.
이 속에서는 요녕식동검도 발견되고 화장한 흔적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춘천 천전리의 지석묘 위에 돌을 쌓은 것 같은 적석총 외 청주와 청양(靑陽)지방에서 발견되고 대구 대봉동 지석묘도 약간 비슷한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 석총계에 속하는 무덤형식들은 지석묘를 제외하면 요녕 · 길림 지방과 남부 시베리아지방과 연결되는데, 돌을 일상생활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에 서로 기술적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한 것으로서, 주로 돌이 흔한 지방에서 발달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 시대에 이르면 정치 · 사회 · 문화 등 각 분야가 고루 발전하고, 특히 국가형태를 갖추면서 권력지배층에서는 그 신분의 과시를 위하여 궁궐 · 저택 · 복식 등을 호화롭게 치장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무덤에 대해서도 전 시대와 다른 여러 가지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적석총과 벽화고분, 백제에서는 전실분(前室墳)과 판석조석실분, 신라에서는 적석봉토분과 궁륭상천장식석실분(穹窿狀天障式石室墳), 가야에서는 장방형석실분, 그리고 영산강유역의 토축묘 등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지면을 고른 다음 약 1m 정도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목관(사체)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분구를 형성한다. 분구의 외형은 시대에 따라 계단식으로 3∼5단의 방대형 또는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 많다.
매장주체시설은 석관식에서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로 발전하였다. 고구려 적석총의 규모는 대형이 40m 이상, 중형이 20∼40m, 소형이 15∼10m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 적석총은 주로 압록강유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중국 땅인 환인현(桓仁縣)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집안현(集安縣) 통구(通溝) 등지에는 수천 또는 수만 기가 밀집되어 있다.
또, 그 대안인 북한의 시중군(時中郡:신설) · 자성군(慈城郡)에도 많고 평양 황산 등지에까지 분포되어 있다. 시기상으로는 환인현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고, 다음이 통구지방의 것이며 평안도지방의 것이 가장 나중이다.
초기에는 강변의 산허리에 축조되다가 차차 평지 강변으로 내려왔다. 돌은 막돌에서 강돌로 바뀌고 후기에 이르면 장군총에서처럼 다듬은 돌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적석총으로 가장 오래된 것에서는 세형동검이 출토되기도 하여 대략 서기전 2세기경으로 보고 있는데 장군총 같은 것은 5세기 이후로 내려간다.
한강유역인 서울 석촌동의 것은 4, 5세기의 계단식적석총이다. 적석총이 압록강유역에서 성행할 때인 3세기 무렵에 중국으로부터 횡혈식석실분이 들어와 고구려식의 벽화고분이 성행하게 되는바 외형은 흙으로 쌓은 방대형의 분구이다.
벽화는 활석으로 석실을 쌓고 그 위에 회를 두껍게 바른 다음 그 벽면에 그림을 그린다. 후기에는 판상석의 표면을 물갈이하여 그 위에 벽화를 직접 그리기도 하였다.
벽화고분은 무덤의 구조와 그림의 내용에 따라 초기 · 중기 · 후기의 3기로 나눈다. 초기의 것은 피장자의 초상화 · 행진도 · 수렵도 등 풍속도, 중기의 것은 풍속도와 사신도(四神圖), 후기의 것은 사신도만 그리거나 사신도와 장식그림을 그렸다.
이런 벽화고분은 지금까지 통구지방에서 20여 기, 평양지방에서 40여 기 등 모두 60여 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대안 덕흥리의 것은 먹으로 쓴 명문이 있어서 연대를 알 수 있다. 이런 벽화고분은 백제의 강역인 공주 송산리 제1호분, 부여 능산리 제1호분으로 그 명맥이 이어져갔다.
고구려의 적석총이나 벽화고분들은 모두 이전에 도굴되어 처녀분은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부장유물은 그 잔품 이외 완전한 것이 없다. 다만, 통구에서 청동호 · 화유토기병, 진파리 제1호분의 금동관편 문양에서 고구려 미술의 수준을 무덤의 축조기술과 벽화와 함께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백제의 무덤은 수도의 이전에 따라 서울 · 공주 · 부여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각 시기와 지역에 따라 특징이 있다. 서울지역은 적석총과 그 밖에 토축묘 · 토광묘 · 석실분 등이 있다. 토축묘는 가락동 제2호분처럼 방대형 분구 속의 지면 위에 토장 · 부석장 · 판자장 등 여러 매장주체시설을 가지고 있다.
이 토축묘의 가장 큰 특징은 매장주체시설을 지면 아래의 토광 속에 설치하지 않고 분구 중에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토광묘는 석촌동 · 가락동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는데 거의가 간단한 토장형식이다.
석실분은 방이동 · 능동 · 중곡동 등지에 다수 있었으나 지금은 방이동에서만 볼 수 있다. 그 중 제1호분과 제2호분은 현재 원형봉토분으로 각각 떼어놓았으나 1983년 정비공사 전까지는 전방후원형의 하나의 분구로 되어 있었다.
내부는 막돌로 횡혈식석실로 쌓은 궁륭상천장식인데 연도(羨道)가 남쪽 벽에 잇대어 시설되었다. 공주지역에는 서울 방이동 것과 같은 궁륭상천장의 횡혈식석실이 송산리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서울과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능치나 소학동 등지에는 서울 중곡동의 것과 같은 횡혈 또는 횡구식의 장방형석실분들이 있다. 이러한 형식은 낙동강유역에 많은 세장형 장방형석실분보다 고식이다.
재료는 납작한 막돌을 골라서 쌓기도 하고 깬 돌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시목동 · 금동에서는 횡혈식석실을 판상석으로 조립하고 천장을 합장식사천장(合掌式斜天障)으로 한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런 천장은 평양의 고산리 제7호분에서 잠깐 보이는데 한나라 무덤에서 많이 보이는 형식이다.
공주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무덤의 형식은 전축분으로 송산리 제6호분과 무령왕릉을 들 수 있다. 벽돌을 구워서 횡혈식으로 석실을 쌓고 천장을 터널식으로 축조한 삼국시대의 무덤은 여기밖에는 없다.
대동강유역지방에 한대의 형식을 충실하게 본뜬 전실분(塼室墳)이 몇 기 있으나 송산리의 전실분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제6호분은 사면 벽에 사신도를 그렸는데 벽돌 벽면에 진흙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린 것이다.
바닥에는 동쪽에 1인용 관대(棺臺)를 놓고 밑으로 배수로를 길게 뺐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로공사 중 발견된 것으로 벽돌 쌓는 방법, 벽감(壁龕)의 위치와 수, 전면 관대 등에서 제6호분과의 차이점이 발견된다. 이 무덤은 매지권(買地券), 즉 지석(誌石)이 나타나 피장자를 처음으로 알게 된 왕릉이다.
따라서, 여기서 출토된 진묘수(鎭墓獸) · 양식(梁式) 청자호 · 순금제관식 · 귀걸이 · 목제베개 · 족좌 · 동경 · 다리미 등 약 2,600여 점의 유물들은 연대가 뚜렷하여 무덤문화 비교의 기준이 되고 있다.
피장자의 관은 동쪽에 왕, 서쪽에 왕비로 배치되었는데, 다같이 사후 2년 8개월 만에 안장되었으니 그 사이 빈(殯) 또는 가장(假葬)으로 육탈(肉脫) 후 이곳으로 옮긴 것 같다.
송산리 제6호분과 무령왕릉을 비롯한 이 지역의 무덤들은 철저한 풍수지리적 방법으로 묘지가 선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법의 응용은 부여로 내려오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는데 그 전형적인 예로 능산리 왕릉군을 들 수 있다. 현무(玄武)에 해당하는 뒤에 주산(主山)을 업고 좌우에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능선이 감싸고 있다.
앞은 확 트여 명당(明堂)을 이루고 동에서 서로 흐른 능산천(陵山川) 건너 주작(朱雀) 방향에 안산(案山)이 있어 이른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이 갖추어져 있다. 부여지방의 횡혈식석실은 대개 판상석으로 조성된 바 이것을 세분하면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능산리 제2호분(中下塚)인데 장대석으로 축조하고 천장이 터널식인 무령왕릉과 같다. 또, 하나는 평사천장(平斜天障)으로서 부여지방 무덤 형식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능산리 제1호분 형식으로서 큰 판석을 곱게 물갈이하여 조립하고 평천장으로 되어 있는데 송산리 제6호분과 같이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들 부여지방의 세 종류의 횡혈식판상석석실분은 모두 지하 깊이 내려가기 때문에 배수로에 신경을 썼다. 백제의 석실분들도 고구려의 경우와 같이 거의 다 도굴되었고 간혹 처녀분이 발견되는 경우 횡혈식석실분에서는 관못 외의 부장물이 거의 없다. 왕릉인 능산리 무덤떼는 별개지만 이런 현상은 불교사상의 보편화와 박장사상(薄葬思想)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부여지방에서는 1971년 화장묘의 유구가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불교식으로 화장한 다음 그 재와 뼈를 골호(骨壺)에 담아 땅 속에 묻는 인도식 장법이다.
중정리 당산정(堂山頂)에서 발견된 화장묘는 석비례층을 지름 43∼50㎝, 깊이 24㎝ 정도로 파고 그 안에 항아리를 안치한 것인데 골호의 종류에 따라 다른 형식도 있다. 화장묘는 사찰의 경내 또는 그 부근에서 자주 발견되었다.
신라의 경우 통일신라 이후의 것이 대부분으로 석함(石函) 안에 골호를 안치하는 형식인데, 백제에서는 석함이 사용된 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신라 무덤형식의 특징은 돌을 쌓아서 이루는 적석형식인데 이런 적석봉토분(積石封土墳) 또는 적석목관분은 경주의 도림지와 그 주변의 산기슭, 그리고 안강 · 창녕 등지에서만 발견되었다. 분구가 거대한 단곽식(單槨式)과 작은 다곽식의 두 종류가 있다.
단곽식은 지면 위에 높이 1m 정도의 단을 쌓고 그 위에 원목으로 목곽을 설치한 다음 사면과 상부를 사람머리 크기만한 냇돌로 쌓아 방대형의 적석부를 축조하고, 그 표면을 봉토로 덮어서 원형의 분구를 만드는 형식이다.
목관 안에는 목관 하나와 부장품을 담는 상자를 설치하고 목곽과의 공간에 토기 등을 배치한다.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 금령총(金鈴塚) · 서봉총(瑞鳳塚) · 천마총(天馬塚) 등은 모두 이 형식에 속한다.
다곽식은 한 분구 안에 여러 개의 매장시설을 만드는 형식인데 지면을 파고 설치하기도 하고 분구 안에 설치하기도 한다. 다곽식 외 집단묘라는 것이 있다.
지면을 파고 소형의 여러 곽을 설치하는 형식인데 목곽은 없고 석곽 안에 직접 목관을 안치한다. 이들 적석봉토분에는 사체를 안치하는 주곽(主槨)과 부장품을 넣는 부곽이 따로 설치되는데 대개 부곽은 머리쪽 바깥에 둔다.
경주시내에는 2기의 원형분이 서로 이어져 표주박모양을 이룬 쌍원분[雙墳, 瓢形墳]이 약 20기나 있다. 하나의 분구에 또 하나의 분구를 잇대어 축조한 것인데 대개는 혈연관계 사람들의 무덤이다.
황남대총(皇南大塚, 제98호분), 광개토왕 호우(壺杅)가 나온 호우총, 은령총(銀鈴塚) 등이 바로 이러한 쌍분이다. 이들 적석봉토분은 냇돌을 두껍고 크게 쌓아올려 석실분과 달리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그 유물은 토기, 금제 · 은제 · 금동제의 장신구, 도검류(刀劍類) · 마구 · 농기구 · 솥 · 청동용기들로서 극단적인 후장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들 적석봉토분은 고구려부터 내려온 적석총이 기본이 되고 5세기경 원형봉토분이 들어오면서 봉토가 입혀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초에 이르면 경주시내의 평지에 쓰던 무덤은 주위의 산기슭으로 옮겨지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 · 백제를 통하여 들어온 불교사상, 풍수지리사상, 중국식의 제도 변혁, 왕권의 확립 등 제반의식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무덤도 외래형식인 궁륭상천장식의 횡혈식이 유행하게 되었다.
충효동 · 서악동의 석실분들, 남산 서쪽 기슭의 무덤들이 이에 속한다. 경주시내와 주변지역에서 소형의 간단한 석관묘들이 발견되는데 이것들은 신분이 낮은 계층의 무덤으로 보인다.
낙동강유역과 가야지역인 남해안에 분포되어 있는 무덤들은 토광묘 · 장방형석실분 · 석관묘 · 옹관묘 등이 있으나 이 지역 특유의 무덤형식은 장방형석실분이다.
이 무덤의 위치설정은 삼국의 경우와 달리 독립된 구릉이나 능선 정상부의 돌출한 곳을 택하였으므로 아래서 올려다보면 장관을 이룬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대구 불로동, 고령 지산동 및 본관동, 함안 말이산, 고성 송학동의 고분군들이 있다.
이런 무덤들의 분구 형상은 대부분 원형봉토분이고 전방후원분도 약간 끼어 있다.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은 좁고 긴 장방형석실로서 수혈형(豎穴形)과 횡구형(橫口形)이 있고 깬돌이나 막돌 등 약간 편평한 돌로 쌓았다.
한 분구에는 대개 2기의 석실이 있는데 ‘二’자형 또는 ‘丁’자형으로 배치된다. 어떤 것은 중심 석실 둘레에 십수 기의 소형석실이 배치된 예도 있다.
이 무덤들 역시 후장으로 토기 · 철검 · 옥제장신구 · 금제장신구 · 마구 등 다양한 부장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 지역의 특수한 무덤으로는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송학동 제1호분[舞妓山古墳], 본관동 및 말이산 고분에서 볼 수 있는 전방후원분이 있다.
영산강유역지방의 무덤으로는 광산군 신창리 옹관묘군, 나주 반남면 고분군과 해남 장고산(長鼓山) · 용두리, 영암 내동리 등의 고분이 알려져 있는데 외형과 내부구조에서 다른 지방과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덕산리의 원추형분구, 신촌리 · 방산리 · 용두리의 전방후원분구, 대안리의 방대형분구 등이 그것이다. 어느 것이나 매장주체시설은 지면 위 분구 중에 있고 다장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한 분구 안에 토장 · 옹관 · 부석장(敷石葬) · 판자장(板子葬) 등이 혼합된 가락동 제2호분 등과 같은 토축묘 계통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런 무덤은 위치선정 · 분구형태 · 축조법 · 매장주체시설 등이 중국 양쯔강유역지방의 토돈묘(土墩墓)와 같은 계통으로 보여 흑조해류(黑潮海流)를 타고 양쯔강구에서 황해를 건너온 문화의 일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은 별개의 정치 및 문화권으로 구분된다.
이 시대의 무덤은 경주지역의 여러 왕릉과 화장묘가 잘 알려져 있다. 왕릉은 경주의 평지에 대형단곽분으로 지증왕 무렵인 6세기 초까지 축조되다가 그 이후 경주 분지의 산기슭으로 옮겨가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먼저 축조된 왕릉은 서악동의 태종무열왕릉 뒤에 일렬로 분포된 대형분들인데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다.
분구는 평지의 대형분들과 같은 규모의 원형봉토분들인데 호석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왕릉은 불국사를 향해서 열려진 남천(南川) 계곡 주변의 산기슭에 있는 것들이다. 이 계곡에서는 괘릉(掛陵)까지 연장되고 다시 부지리 · 오류리와 안강 등지로 전개되었다.
대형분구는 보문동의 진평왕릉으로 전해지는 능[傳眞平王陵]과 낭산(狼山) 남록의 신문왕릉으로 전해지는 능[傳神文王陵] 및 선덕왕릉을 끝으로 그 이후 소형화되어가는 반면, 형태상으로는 중국의 천자능을 축소한 것 같은 제도로 발전한다.
분구 둘레의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병풍석과 난간과 복도, 분구 네 귀의 석사자상,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능비, 문무석인, 화표석(華表石) 등의 배치가 그것이다.
그 중 병풍석은 중국에도 없는 표현물로서 강성해진 국력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신덕왕릉과 효소왕릉으로 전해지는 능을 보면 깬 돌로 쌓은 것으로 연도가 딸린 궁륭상천장식 구조로서 규모가 작아 화장용 석실 같다.
이 무렵 일반에서도 화장묘가 성행되었으리라는 것은 경주지방에서 골호가 많이 발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신라의 화장묘는 지하에 석함을 설치하고 그 안에 외호(外壺)와 내호를 설치하는데, 내호가 곧 골호이다.
이 시대는 횡구식석실 · 석곽묘 · 토광묘 · 회곽묘(灰槨墓) 등이 채용되었다. 횡구식석실은 신라시대의 그것과 비슷하나 막돌로 연도 없이 축조하였고 평천장이다. 개성 부근의 왕릉들과 지방의 귀족묘 등이 대개 이 형식을 택하였다.
여기에는 목관을 사용한 신전장(身展葬)이 많으나 간혹 화장묘도 보인다. 석관묘의 경우는 슬레이트를 잘 다듬어서 표면에 사신도를 선각(線刻)하고 묘지명을 묻은 경우도 있다.
석곽묘는 소형토광묘와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된 형식으로 지하에 비교적 깊게 장방형의 광을 파고 우두(牛頭)의 큰 돌로 1단 또는 2단으로 네 벽을 쌓고 판상석으로 천장을 덮었는데, 강화 외포리와 논산 득원리의 석곽묘가 알려져 있다. 이것들은 길이 2m, 너비 1m에 높이 60∼70㎝ 정도이다.
토광묘는 전통적인 목관용 토광이다. 석관묘나 토광묘 중에는 머리 부위의 측벽에 부실(副室)을 만들거나 광벽에 벽장 같은 감실(龕室)을 만들어 부장물을 넣은 것도 있다. 회곽묘는 고려 말기에 비롯되어 조선시대에 성행한 형식이다. 토광 안에 생석회로 곽을 만드는데 겨우 관을 안치할 정도로 한다.
고려시대의 무덤은 어느 형식이거나 분구는 토총이 주류이며, 그 형상은 원형 또는 장방형인데 방형의 경우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두른다. 진주 평거동의 정씨(丁氏)네 무덤들이 그 좋은 보기이다.
고려의 석실벽화분은 벽면에 회를 발라 고르게 하거나 판상석의 면을 잘 갈아서 그 위에 풍속화 · 사신도 · 별자리그림 등을 그린다.
특이한 예로 거창 둔마리 고분의 경우 석실이 동서 2실로 되고 천녀상(天女像)이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 무덤은 전대에 비하여 두가지의 특징이 있다.
하나는 풍수지리사상이 더욱 철저해진 점이고, 또 하나는 부장품이 박해진 점이다. 금은옥석으로 만든 장신구가 거의 없어지고 대신 동경과 자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불교의 생활화와 북방계문화의 영향이 증대된 까닭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의 무덤은 고려시대의 전통형식을 바탕으로 거기에 새로운 지도이념인 유학사상으로 보완되어진다. 석곽묘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석실도 거대한 석곽 또는 석관형으로 변하였다.
화장묘가 사라지고 중국식토광묘가 일반화하고 고려시대에 이어서 풍수지리사상이 더욱 보편화하였다. 부장물로는 백자 등 자기가 주로 애용되었다.
외형은 초기의 원형과 장방형에서 중기 이후 거의 원형분으로 정형화하고 묘비가 일반화하며 고관의 무덤 입구에는 신도비가 서게 되었다.
이 시대는 조선시대의 유교적 매장법을 계승하여 원형토광묘가 주류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시 · 읍 또는 마을의 공동묘지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공동묘지에 화장장을 설치하여 화장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산간오지나 도서 등 일부에서는 매우 드물게 초분(草墳)이라 하여 사체를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어두었다가 육탈 후에 매장하는 풍습도 있었으나 당국의 강력한 단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광복 후 특히 6 · 25전쟁을 겪고 기독교가 성행하면서 무덤형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장방형의 낮은 분구, 분구 둘레에 장대형의 호석을 두르는 등 원형분 일변도에서 모양의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무덤의 내부는 여전히 토광의 전통법이 고수되고 있다. 근래에 국토의 이용과 개발이라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묘지문제가 정책상의 한 과제가 되어 가족묘지 또는 개별묘지의 단위면적을 극도로 제한하고 공원묘지의 권장 이용도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불교의 영향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변화로 무덤을 축조하지 않고 화장, 산골(散骨)하는 새로운 장법도 증가하고 있다.
무덤은 흔히 유택(幽宅)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사자가 저승에서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또, 왕의 무덤인 능을 능침(陵寢)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사후에 편히 쉬는 곳을 뜻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무덤이 사자가 사는 집 또는 쉬는 곳이라는 관념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왔으므로 그 집인 무덤을 지키고 가꾸는 조형과 조경의 역사도 그만큼 오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덤의 조형과 조경은 크게 나누어서 무덤의 보호 · 미화 · 기념표지의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보호적 측면은 비로 인한 유실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붕괴하는 따위의 기상적 피해, 동물의 침범, 산불의 연소 등을 막는 조처이다. 묘계보호로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기록은 묘계(墓界, 墓域)에 묘수(墓樹)를 심는 일인데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비롯된다.
즉, 『삼국지』의 위서 동이 고구려전에 사람이 죽으면 금 · 은 등 여러 가지 재물을 다하여 후장하는데, 무덤은 “돌을 쌓아 봉을 하고 줄지어 송백을 심는다[積石爲封列種松柏].”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방풍과 산화방지가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또, 중국 요녕성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한 이 지역의 기단식적석총의 아랫기단에는 큰 자연석을 기대어 세운 호석(護石)들이 있는데, 이것은 붕괴와 동물들의 침해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려는 조처일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광개토대왕릉에는 330호, 신대왕대의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의 무덤에는 20호의 묘수(墓守)를 두어 무덤의 관리와 보호를 맡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고귀한 신분인의 무덤에는 많은 관리인을 상주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묘수 풍습은 조선시대의 종산 산지기[山直]로, 또는 사대부가의 여막[廬幕] 살이의 풍습으로 이어진다.
4세기 무렵부터 중국의 원형봉토분이 들어오면서 분구와 그 주위의 묘계에 잔디를 심은 것은 지금 평양에 있는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다.
무덤에 잔디를 입히는 것은 조경적 미화도 겸하는 것이지만, 원래는 무덤을 유실이나 붕괴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가 앞섰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에 나타나는 묘수 · 호석 · 잔디 등의 보호 대비는 백제와 신라에서도 나타난다.
서울 석촌동의 백제 고분인 제3호 · 4호분은 정방형 기단식적석총인데 그 아랫단에 자연석의 호석들이 서 있다. 이 묘계에도 본래는 송림으로 외곽을 조성하였던 곳이다.
백제는 5세기 후반에 석실봉토분으로 변하면서 분구에 잔디가 심어지기 시작하였고 공주의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부여 능산리 고분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신라의 왕릉들이 당시 신라인들이 신성시하던 신림(神林) 가에 많은 것은 묘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릉(五陵)이 천경림(天鏡林) 가에 있고, 선덕여왕릉과 신문왕릉이 신유림(神遊林) 가에, 내물왕릉과 미추왕릉이 계림(鷄林) 가에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김유신조(金庾信條)에 김유신의 부인인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상곡(靑淵上谷)에 장사지냈는데, 봄이 되면 집안의 사녀(士女)들이 모여 잔치를 할 때 온갖 꽃이 피고 송화가 골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으니, 능묘 주위의 송림과 조경적 환경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지금도 경주의 왕릉이나 귀족의 무덤에는 고운 잔디와 울창한 송림이 잘 조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신라 왕릉의 호석은 몇 단계로 변천되었다. 4, 5세기 적석목관분들의 분구 외곽기저에는 냇돌로 호석을 축조하였는데 흙으로 덮여 있다.
선덕여왕릉에는 고구려 적석총의 자연석 호석과 같은 것이 분구 아래쪽 주위에 간격을 지어 세워졌고, 무열왕릉에도 분구 주위에 자연석 호석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외에 분구 남쪽에 장대석으로 짠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다. 신문왕릉은 다듬은 돌로 호석을 쌓았고 삼각형의 돌기둥을 같은 간격으로 둘렀다.
성덕왕릉은 판석으로 호석을 짜 둘렀고 판석 표면에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었다. 이것은 고구려나 백제의 벽화고분 속의 사신도와 같은 뜻의 방위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이 십이지신상 밖으로 봉토 둘레를 따라 방주석(方柱石) 난간을 두르고 봉토 앞에 혼유석, 다시 그 앞에 동서로 문무석인을 하나씩 세우고 다시 그 앞에 돌사자 하나씩을 세웠는데 돌사자는 봉토 뒷면 양측에도 하나씩 배치하였다. 이 돌사자는 사방에서 잡귀를 쫓는 벽사(辟邪)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 십이지신상이 있는 능으로는 경덕왕릉, 원성왕릉으로 전하는 괘릉, 헌덕왕릉 · 흥덕왕릉 · 김유신장군묘 등이 있고 이 밖에 구정동 방형분 등은 십이지신상이 분구 판석에 양각되어 있다.
분구 호석에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었으며 문무석인 · 돌사자 · 혼유석 · 돌난간을 고루 갖추고 능역 규모와 송림 조경 등이 가장 잘된 것은 괘릉이다. 가야지역과 영산강유역의 무덤들에도 잔디와 송림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무덤 중 대표적인 것은 개성의 공민왕릉이다. 분구를 중심으로 동 · 서 · 북 삼면에 곡담을 두르고 능역을 상하로 나누어 4단의 구역으로 조성하였다. 제1단인 분구 앞에 혼유석[石床]과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제2단에는 장명등과 문석인, 제3단에는 무석인이 있고, 제4단에는 정자각(丁字閣)과 능비가 서 있다.
분구에는 신라의 경우처럼 십이지신상 호석을 두르고 호석 외곽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분구 주위에 석수(石獸)를 배치하였다. 이러한 능역은 모두 잔디공간이며 그 외곽은 송림이다. 강화도의 이규보묘(李奎報墓)나 파주의 윤관묘(尹瓘墓), 벽제의 최영묘(崔瑩墓) 등은 풍수지리사상의 형국을 중시한 예들이다.
조선시대 무덤 중 큰 규모를 갖춘 것은 역시 왕릉인데 주산 · 안산 · 청룡 · 백호로 감싸이고 물줄기가 휘감고 흐르는 풍수지리설의 이른바 장풍득수의 형국에 맞는 곳을 가렸다. 입구의 홍살문[紅箭門]을 지나 신로교(神路橋)라는 돌다리를 건너서 배위청(拜位廳)이라 하는 정자각에 이른다.
배위청 다음에는 동서 양쪽에 수복방(守僕房)이 있고 다시 동쪽에 비각이 있다. 경사진 능역에 오르면 분구의 호석 · 곡담 · 돌난간 · 혼유석 · 장명등 · 망주석 · 문무석인 · 석수 그리고 능역의 잔디공간, 송림 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경우와 대동소이하다.
다만, 석수가 좀더 다양화하고 또 인조의 장릉(長陵)부터는 호석에 십이지신상 대신에 모란문이나 연화문을 새기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장명등은 태조∼숙종 이전은 팔각형이었다가 1698년에 세워진 단종릉부터 사각형으로 바뀌었다. 고종과 순종은 황제라 칭하였으므로 그 능은 명태조 효릉(孝陵)의 제도를 본떠서 홍살문에서부터 말 · 낙타 · 해치 · 사자 · 코끼리 · 기린 · 무석인 · 문석인들이 참배로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되는 변화를 보였다. 조선왕조의 능은 왕궁에서 40㎞ 거리 안에 설치되는데 한 구역 안에 여러 능이 모여 있는 곳이 많다.
고종과 세종의 능에는 재실과 홍살문 사이에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능이 있는 계곡은 습지로 물오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민묘(民墓)는 곡담을 두르고 석인 · 석상 · 망주석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고, 종2품 이상의 고관묘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수도 있었다. 일반 사대부의 묘에는 간단한 묘비를 세우고 가족묘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서민의 묘에는 분구만 만들고 석물을 설치하지 않는 제도였으나, 지금은 그런 규제가 모두 없어졌으므로 망인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무덤의 조형과 조경을 자유로이 하게 되었다.
무덤을 ‘사자의 집’이라 보아온 관념은 동서양이 거의 같다. 한국인의 무덤에 대한 의식은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역사와 함께 변천되었다.
이것을 시대적으로 분류할 때 지석묘와 종교적 관념, 순장(殉葬) 풍습, 조상숭배와 계세사상(繼世思想), 풍수도참사상과의 결합 등 크게 네 가지로 갈라진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원시문화, 특히 장법(葬法)에 있어서 가장 특색 있는 것이다.
지석묘가 인근의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더러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그 분포 중심은 우리나라였고, 중국 · 일본의 경우 그 지역이나 양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지석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나라를 ‘지석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석묘는 사자를 매장하는 무덤이므로 원시적 신앙과의 관계가 없을 수 없다.
지석묘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어느 형태이든간에 매장주체시설 위에 거석을 덮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와 같이 거석을 복개한 목적은 사령(死靈)을 외경하여 그것이 현세로 환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사자 및 그 가족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어느 설을 따르든지 거석복개는 사자가 생자에 간여하는 것을 꺼리는 무속적 관념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석묘의 개석을 들어내고 발굴해보면 유구 둘레에서 붉은 흙이 발견되는 예가 있다. 이것은 사체를 매장하기 전에 적토를 뿌리고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였으리라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사자는 초능력적인 힘으로 생자에게 재앙을 끼칠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령을 달래어 안주하게 함으로써 생자에게 끼칠 재앙을 예방하는 의식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순장의 풍습은 동양의 여러 민족 사이에 행하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발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진시황릉의 무수한 병사용(兵士俑) · 마용(馬俑) 등은 순장풍습의 변화된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에는 대규모의 순장이 행하여졌다. 순장이란 현세에서 권세와 부귀를 누리고 많은 노비와 시종을 거느려 호화로운 생활을 한 자가 죽으면 사후에도 생시와 같은 안락한 생활을 계속시키기 위하여 풍부한 부장품과 함께 시종자들을 딸려 매장하는 것이다.
『위서』 부여전에는 “살인 순장자가 많은 것은 100여 명이나 되었다[殺人殉葬多者百數].”고 하였다. 삼국시대도 한동안 순장이 계속되었다.
고구려에서는 247년(동천왕 22) 국법으로 순장을 금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이고, 1917년 고고학 발굴보고에 따르면 양산(梁山) 부부총에서 고귀한 부장품과 함께 세 사람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는 순장 흔적이 보고되었다.
신라에서는 502년(지증왕 3) 국법으로 순장을 금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1,500년 전까지도 순장이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순장풍습은 계세사상과 직결된다. 우리 옛사람들은 사후에도 현세와 같은 삶을 누린다는 관념을 가진듯하다. 이러한 계세사상에서 사체를 중히 여긴 나머지 순장의 풍습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고대에는 시신을 훼손시키는 것을 크게 죄악시하여 부여에서는 사체의 부패를 막기 위하여 얼음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삼국지』와 『위지』 부여전에 전한다.
이것은 시신이 훼손되면 영혼이 머무를 곳을 잃고 허공을 떠돈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사령의 안주처인 무덤은 안락한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어 생자가 자신의 사후 거처를 미리 선정해놓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민중왕이 전렵(田獵) 중에 한 석굴을 발견하고 자기가 죽거든 이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 고대인들은 조상과 자손이 생사를 초월해서 하나의 가족공동체를 이루므로, 조상의 죄과는 그 자손을 해치고 그 반대로 조상의 공훈은 여러 대에 걸쳐 자손에게 은덕을 미친다고 믿었다.
자손은 조상령의 안존을 빌기 위하여 지성으로 제사를 받들어야 하였고, 여기서 봉사손(奉祀孫)을 중시하는 가부장적(家父長的) 제사상속(祭祀相續)이 생겼다. 대가 끊기는 것을 가장 큰 불효라 생각하였으므로 남자는 첩을 두어서라도 혈손 얻기를 소망하였다.
그리하여 여자의 간음은 엄격하게 금하였으나 남자의 경우는 비교적 관대하였다. 이러한 생사를 초월한 가족공동체의식과 계세사상은 유교사상과 접하면서 좀더 내면화, 도덕화하게 되었다.
조상을 숭배하고 그 무덤을 소중히 하는 의식이 유교로부터 배운 것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 내 생명은 조상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므로 조상의 유택인 무덤을 잘 가꾸어 보존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기』의 교특성(郊特性)에서 “만물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사람은 조상에 근본을 두므로[萬物本乎天 人本乎祖]” 사람은 보본(報本)의 뜻으로 조상의 무덤을 소중히 받들고 이것을 자손에게 물려주어 그치지 않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조상의 무덤은 효도를 가르치는 산 교육장이라는 생각이다. 『예기』의 제통(祭通)에서 “무릇 제사를 지내는 일은 크기도 하다……밖으로는 임금을 존중하도록 가르치고 안으로는 부모에 효도하도록 가르친다[夫祭之爲物大矣……外則敎之以尊其君長 內則敎之以孝其親].”고 한 생각이 그것이다. 또, “제사는 교육의 근본이다[祭者敎之本也].”라고도 하여 제사, 나아가서는 무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무덤이 일찍부터 풍수도참사상과 결부되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 사람이 사는 터를 양기(陽基)라 하고 죽은 사람의 집인 무덤을 음택(陰宅)이라 하여, 좋은 양기에서 살면 부귀 다자손하여 행복하고 좋은 음기에 조상을 모시면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발복(發福)한다는 것이 풍수지리적 사고이다.
조상의 시신은 비록 유명을 달리하였을지라도 자손과 연결된 기(氣)는 그대로 유지되어 살아 있는 자손에게 길흉화복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조상의 시신이 명당에 묻히면 자손이 번창하고 흉지에 묻히면 온갖 재앙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 풍수지리사상이다. 그리하여 조상을 명당에 묻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고 그로 인하여 무덤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많았다.
특히, 고려 태조가 「훈요십조(訓要十條)」중에서 풍수도참을 언급한 이래 성행하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왕실이나 민간이나 풍수지리에 온통 휩쓸려 들어갔다.
그것은 자손의 발복이라는 이기적 동기가 조상에게 효도한다는 추효(追孝)로 위장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성행되어갔다. 비록, 불길한 천명을 타고났을지라도 조상의 시신을 길지에 모심으로써 전화위복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는 어느 의미에서 천명을 거역하는 일이므로 함부로 할 수 없고 전문적 술사인 지관[地官, 지사(地師)]의 힘을 빌리게 된다. 길지의 선정은 산맥의 흐름을 보는 간룡(看龍), 혈점을 향하여 산세가 수렴되는 것을 보는 장풍, 주위 하천의 물 흐름을 보는 득수, 관을 안치할 광을 정하는 재혈(裁穴), 방향의 길흉을 정하는 방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이 풍수지리사상은 중국에서 비롯되어 삼국시대 우리나라로 유입된 것으로, 특히 고려 건국에 간여한 도선(道詵)과 조선 태조의 왕사로서 한양에 도읍을 정한 무학(無學) 등 주로 승려에 의해서 전승되다가, 조선조에 들어서는 수많은 명사가 배출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무덤은 우리나라 사람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므로 무덤과 관련된 속담도 적지 않다. 어떤 허물에도 변명할 구실은 있다는 뜻으로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것이 있고, 건성으로 시늉만 내는 행위를 일러 ‘처삼촌 무덤에 벌초하듯’이라고도 한다.
잘난 자식은 제구실한다고 다들 외지로 나가고 못난 병신 자식이 남아서 부모 봉양한다는 경우에 ‘굽은 솔이 선산 지킨다.’고 하는 경우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을 일러 ‘산소등에 꽃이 피었다.’고 하는 경우의 ‘선산’이나 ‘산소’ 등도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
한편, 죽음은 곧 무상(無常)이요 무상은 애상(哀傷)을 자아내는 촉매이므로 예로부터 시가에는 무덤을 소재로 한 것이 많은데 각기 다양한 이미지로 쓰이고 있다.
정철(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에는 무주공산의 황량한 종말로 읊어졌고, 임제(林悌)는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어 인생무상을 한탄하였다.
현대에도 김소월(金素月)은 「금잔디」에서 무덤가에 돋아나는 잔디의 새싹을 보고 가신 임의 환생을 느꼈고, 박두진(朴斗鎭)은 「묘지송(墓地頌)」에서 비 내리는 공동묘지를 보고 그래도 외롭지는 않겠다고 위로를 보냈다.
우리나라의 무덤은 원시적 가족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거기에 외래의 제도 · 사상 · 풍습 등이 융합되면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천해 왔다.
이 변천과정에서 주류를 이룬 장법의 두드러진 특징은 선사시대의 지석묘와 삼국시대 중기까지 이어진 순장의 풍습, 그리고 고려 초부터 성행하여온 풍수도참사상 등이다. 특히, 우리 민족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조상의 무덤을 소중히 여겼다.
무덤을 쓰는 것이 반드시 풍수도참사상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매장을 선호하였으며 이에 따라 무덤을 만들었다. 이러한 무덤 중시사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폐단도 지적되고 있다.
1997년 말 현재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남한면적 9만9313㎢ 중 11%인 996㎢가 무덤으로 총분묘 수는 1,998만 기이다. 이 중 무연고묘가 40%인 800만 기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묘지문제는 토지이용과도 관련되어서 큰 정책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1인당 매장면적이 규제되는 등 여러 가지 조치가 있다고는 하지만, 한 해에 약 20만 기가 매장, 형성되어 약 8㎢씩 늘어가고 있는 추세인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의 매장선호관념이 있는 한 무덤의 절대면적은 줄어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상의 무덤을 소중히 생각하는 데서 오는 폐단에도 불구하고 무덤에 대한 중시는 경조사상이나 가족공동체의 결속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많은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