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우연히 발견된 석검이 당시 국립박물관 부여분관(현 국립부여박물관)에 신고되어 조사하게 되었다. 이미 7기는 파괴되어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신고한 뒤에 파괴되지 않은 유적 2기와 비교적 상태가 좋은 파괴고분 1기가 조사되었다.
이 일대는 풍화암반층으로 석비레층을 파고 화장묘를 만들었다. 화장묘는 형식이 다른 세 종류의 묘제가 발견되었다.
가운데 뚜껑이 있는 사발[盌]을 1개만 묻은 것[單盌式], 뚜껑덮인 2개의 사발을 상하 2층으로 쌓은 것[二重盌式], 뚜껑있는 단지를 가운데에 두고 주위에 작은 사발 8개를 배치한 것[心壺多盌式] 등이 있다.
구조는 모두 둥근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부식토를 얇게 깐 뒤 골호를 안치하고 주변을 부식토로 메웠다. 뚜껑은 커다란 돌로 덮었던 것도 있으나 없는 것도 있는데 원래 있었던 것이 없어진 듯하다. 부식토에서 민무늬벽돌조각[無文塼片]들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뚜껑돌 위에 벽돌을 깔았는지도 모른다.
이 밖에 백제시대 유물로서 연화문와당 1장, 어망추(漁網錘) 1개, 백제토기편이 발견되었다. 신고된 석검은 청동기시대 분묘 유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나 유구의 구조는 알 수 없다.
이 지역은 예비군 참호공사 등으로 지형이 많이 변했고, 주위에 백제시대 무문전편이나 백제토기편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 화장분묘가 집중적으로 매장되었던 지역인 듯하며, 선사시대유적도 있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