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고산동7호분은 대성구역 고산동 당산마을 북쪽에 조성된 약 20여기에 이르는 고산리고분군에 속한 무덤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고산리7호분으로 불렸으며 북한에서는 식물원9호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무덤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사되었으나 벽화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5월까지 진행된 5차례의 대성구역 고구려고분군 발굴을 통해 무덤구조와 벽화 내용이 확인되었다.
고산동7호분 흙무지〔封土〕의 외형은 방대형이며 무덤의 방향은 서쪽으로 23° 기운 남향이다. 널길〔羨道〕과 동서 감실(龕室)이 있는 앞방, 이음길, 널방〔玄室〕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다. 앞널길의 길이×너비×높이는 각각 2.66m×1.10∼1.42m×1.55m, 뒷널길은 80㎝×92㎝×1.56m, 앞방은 2.10m×1.32m×1.94m, 동쪽 감실은 1.18m×1.05m×1.76m, 서쪽 감실은 1.20m×1m×1.71m, 이음길은 86㎝×1.06m×1.54m, 널방은 3.50m×3.40m×2.40m이다. 앞방 서쪽 감실의 천장은 평행고임 위에 꺾음천장이 더하여진 이른바 배집천장이며, 동쪽 감실의 천장은 3단의 평행고임 위에 1단의 삼각고임을 올린 평행삼각고임이다. 앞방과 이음길은 평천장이며, 널방 천장은 평행고임 한 단만 남아 있어 원래의 천장구조는 알 수 없으나 평행삼각고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널길과 앞방 사이를 돌로 쌓아 막았으며 널방 벽은 사암으로 쌓아올렸다.
무덤칸 안에 회칠을 한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나 회벽이 대부분 떨어져나가 벽화 내용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앞방 동벽에서 기와집과 인물, 수레, 말 그림이 확인되었고 앞방 서벽에서 기와집과 인물행렬, 커다란 나무, 말과 마부 등의 모습이 발견되었다. 남은 그림으로 보아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고산동7호분은 동서 감을 지닌 앞방과 정방형 널방, 생활풍속도 위주의 벽화구성 등을 통해서 볼 때 고산동10호분과 같이 5세기 전반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