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는 토총(土塚)에 반대되는 개념인 석총(石塚)을 의미한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선사시대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고인돌·돌널무덤[石棺墓] 등이 포함되며, 좁은 의미로는 장군총과 같은 고구려시대의 돌무덤이 대표적이다.
선사시대의 돌무지무덤은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시체를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은 가장 원시적이고 간단한 묘제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그 예로는 경기도 시도(矢島), 서울 암사동, 충청북도 제천시 양평리의 유적들이 있다. 이러한 선사시대 돌무지무덤의 전통은 이후 역사시대로 이어져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강원도 춘천시 천전리의 돌무지무덤은 중심부에 두 세 개의 돌널이나 돌덧널[石槨]을 두고, 그 위에 큼직큼직한 석괴(石塊)를 쌓아올린 형태이다. 연대는 고인돌의 축조연대와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인돌은 형식상 북방식·남방식·개석식(蓋石式)의 세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세계적으로 분포하는 거석문화의 일부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우리나라의 고인돌 수가 주변지역에서 발견되는 숫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전파와 관계없는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발생으로 보고 있다.
돌널무덤은 판석으로 짠 상자모양의 무덤을 말하는데, 괴석이나 냇돌로 쌓은 돌덧널무덤도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돌널무덤은 예니세이강 상류 청동기문화인 카라수크기(Karasuk期)와 타가르기(Tagar期)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 돌널무덤의 경우는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청동기문화의 기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돌덧널무덤은 돌널무덤에 비해 할석(割石)이나 괴석을 이용해서 쌓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전 괴정동, 대구 대봉동, 김해 회현리 등지에서 발견된다. 이 묘제는 초기철기시대부터 사용되어 삼국시대 초기를 거쳐 우리나라의 기본 묘제로 발전해나갔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돌무덤은 고구려 초기에 사용되던 무덤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는 만주 집안현(集安縣)과 압록강유역 등지에서 발견되는 초기의 돌무지무덤이다.
이 돌무덤은 초기의 무기단식(無基壇式)에서 기단식, 널길[羨道]이 있는 형태의 기단식 등으로 발전한다. 가장 완비된 돌방이 설치된 기단식의 예로는 만주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들 수 있다.
장군총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7단으로 쌓은 피라미드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 약 30m, 높이 약 13.5m의 규모이다. 제1단에는 각각 3개의 큰 자연석을 둘레돌[護石]로 기대어 세웠으며, 돌방은 제3단의 윗부분을 바닥으로 하는 상자모양의 네모형이다.
또한 충청북도 제천시 도화리와 양평리, 경기도 양평군 문호리, 춘천 중도(中島) 등지의 한강유역에서도 돌무지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초기백제의 지배집단이 고구려계 남하유민이라는 사료의 기록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보다 늦은 서울 석촌동 4호분의 경우는 형식상의 널길이 달려 있는 3단의 기단식 돌무지무덤임이 발굴결과 확인된 바 있다.
특히, 제천 도화리와 양평리 돌무지무덤의 경우는 한 변의 길이가 약 30∼6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여서 당시 지배층의 묘였음을 알 수 있다.
남한강유역에서도 고구려계통의 돌무지무덤들이 확인됨에 따라 백제 초기 역사의 이해에 새로운 시각이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