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역(墓域) 또는 영지(塋地)·영역(塋域)·영전(塋田)·영묘(塋墓) 등으로도 불린다. 묘계는 대체로 분묘가 있는 주위 지역을 통틀어 일컬으나, 주위의 산림이나 경작지와 구분되는 구역의 의미도 있다.
중국의 경우 묘역은 묘문(墓門:묘앞에 세우는 문)·묘도(墓道:분묘에 이르는 길)·묘조(墓兆:분묘)와 분장(墳墻:분묘의 주위에 쌓는 담)을 설치하고, 주위에 묘수(墓樹)를 심어 다른 구역과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묘문이나 묘도·분장 등은 설치하지 않고 단지 분묘와 그 주위를 잔디로 가꾸어 구역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범위는 보(步:옛날의 영조척으로 5자, 또는 周尺으로 6자)를 단위로 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묘계는 ≪고려사≫에서 처음 보이는데, 이에 따르면 976년(경종 1) 2월 문무양반의 묘지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품은 방(方:좌우) 90보, 2품은 80보로 하며, 분묘의 높이는 모두 1장6척이다. 3품은 70보에 분묘의 높이는 1장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4품은 60보, 5품은 50보, 6품 이하는 모두 10보로 하되 높이는 8자를 넘지 못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규정은 1083년(문종 37)까지도 그대로 시행되었으며, 이 때 6품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는 규정이 새로 추가되고 있다.
이는 1404년(태종 4) 왕이 예조(禮曹)에 명하여 품계와 서민의 분묘의 보수(步數)를 상정하도록 하면서 ‘1083년에 정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품부터 5품까지는 앞의 것과 같으나, 6품은 방 40보, 7품부터 9품까지는 방 30보, 서민은 방 5보로 하고, 보수는 주척과 같이 쓴다고 하였다. 그러나 1418년(태종 18) 종친의 묘지에 대한 새로운 규정과 함께 문무관의 묘지가 좁아서 이를 배로 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즉, 종친으로서 1품일 때는 4면(四面:전후좌우)이 각각 100보에 한하며, 그 밑은 품계에 따라서 각각 10보씩 줄여 4품의 경우 4면 70보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문무관의 경우는 이보다 10보씩을 더 줄이고 있다.
예를 들면 1품일 때 문무관의 경우 4면을 각각 90보, 2품은 80보로 제한하고 있으며, 3품 이하도 마찬가지로 그 이전에 정하였던 크기보다 2배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1품일 때 종래에는 방 90보로 하던 것을 4면 모두 90보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민가에서 100보 이내는 매장을 금하고 있다.
이 규정은 그 뒤 ≪경국대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7품 이하나 생원·진사·유음자제(有蔭子弟:과거를 거치지 않고 공이 있는 조상의 혜택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손)의 경우는 6품과 같으며, 여자의 경우 남편의 벼슬에 따르도록 한 규정이 첨가되어 있다.
그 밖에 인가에서 100보 이내는 물론, 경성 주위의 10리 안에도 매장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묘지규정은 현재의 법률에서도 정하고 있다. 즉,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에 의하면, 개인 묘지면적은 80㎡ 이하로 하며, 분묘의 점유면적은 1기일 때는 20㎡ 이내, 합장일 때는 25㎡ 이내로 규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