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상여를 보존해 온 마을의 이름을 따서 남은들상여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상여는 조선 고종의 할아버지이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묘소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가동으로 옮길 때 쓰여졌던 것이라고 한다.
남연군은 1822년(순조 22)에 죽었는데, 초장지(初葬地)는 경기도 광주시 분원리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언제 어떻게 초장을 하고 이장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 전해 오는 말로는 현재 남연군의 묘소가 있던 터는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터가 천하의 명당이라는 지관의 풍수설에 의하여 흥선대원군이 몰래 불을 놓아 태우고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장을 하고 난 그 이듬해 둘째아들인 이재황(李載晃)을 낳았으며, 이 묘의 지덕(地德)으로 나중에 고종으로 등극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이전에 이장하였으리라고 보이며, 이 상여 또한 그 이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자료의 하나로, 고종은 즉위 이듬해인 1865년 남연군묘소에서 동쪽으로 2㎞ 정도 떨어져 다시 세워진 가야사를 보덕사(報德寺)라고 명명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남연군의 묘비에는 1865년으로 건립연대가 음각되어 있어, 고종의 즉위와 남연군에 대한 인식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남은들상여와 남연군에 얽힌 유래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상여의 구조는 기본틀인 장강채의 앞뒤 양끝 아래쪽으로 쇠고리를 달아 횡강채를 끼우도록 되어 있고, 중간에 소방상(小方狀:현지에서는 연초라고 부르고 있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장강에 세운 기둥 위에 배방목(排方木)을 끼우고, 그 위에 판첨(板簷:현지에서는 윗난간이라고 부르고 있다)을 올린다. 이 판첨은 상첨과 하첨으로 나뉘어 이어져 있는데, 유소를 단 ‘봉못’을 좌우에 4개, 앞뒤에 2개씩 끼워 배방목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판첨 네 귀에는 유소를 단 봉수(鳳首)를 꽂았다. 판첨 아래로는 네 면에 검은 천으로 된 벽적(辟積:빈 곳을 가리는 데 쓰이는 천)을 둘러 소방상을 감싸고, 바로 판첨 아래에 붉은 비단띠에 노란 비단폭으로 만든 진용(振容:깃발 모양으로 작게 만들어 상여에 달아 흔들릴 때마다 펄럭이게 한 장식품)을 내려 드리웠다.
판첨 위에는 지붕과 같이 둥글게 만들고 앞뒤판에 용각을 새긴 만충연(彎衝緣)을 배방목에 달고, 겉에는 검은 천으로 씌운 별갑(鼈甲)을 설치한다. 그리고 그 위에 ‘용마루와 꼭두각시’라고 부르는 정자(頂子)를 중앙에 꽂은 용머리와 몸채를 새긴 연용(緣桶)을 올린다. 또한 소방상의 앞뒤에 네 개의 앙장채를 펴서 앙장(仰張)을 쳤으며, 네 개의 앙장채는 끈으로 장강채에 묶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였다.
장강채의 길이는 596㎝, 판첨의 길이는 196㎝, 너비는 76㎝, 높이는 16.5㎝이며, 별갑의 만충연의 길이는 69㎝, 너비는 52.5㎝, 높이는 35. 3㎝이고, 연용의 길이는 85㎝, 높이는 26.5㎝이며, 꼭두각시의 높이는 25㎝이며, 앙장의 크기는 284×185㎝이다.
전체 구조는 장강 · 소방상 · 별갑 · 판첨 · 앙장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어 왕가(王家)의 대여(大轝)와 비슷한 격식으로 되어 있으나, 소방상 밖의 주위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이 다르다고 하겠다.
이러한 구조나 또는 그 부속품들의 조각수법과 4㎝ 두께의 목재를 사용한 점, 그리고 그 겉에 입힌 단청의 질이나 수법이 매우 뛰어난 점 등으로 보아, 왕가에 버금갈만한 가문에서 제작한 것이라 짐작된다. →상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