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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의 발인(發靷) 절차에 따라서 상여꾼들이 망자의 시신을 장지(葬地)까지 운구하는 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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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상여는 장례의 발인(發靷) 절차에 따라서 상여꾼들이 망자의 시신을 장지(葬地)까지 운구하는 상구로, 어깨에 메고 망자를 운구하는 여러 상구를 대표하는 용어이다. 고대국가 상여는 관의 사용과 죽은 자를 보낸 기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각 시대별로 다양한 종류의 상여가 사용되었다.

목차
정의
장례의 발인(發靷) 절차에 따라서 상여꾼들이 망자의 시신을 장지(葬地)까지 운구하는 상구.
종류와 특징

관의 사용과 “북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면서 죽은 자를 보냈다.”라는 기록은 고대국가 장례에서 상여의 활용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상여는 주자의 『가례(家禮)』에 수록된 「喪轝之圖」의 대여와 유거로 구체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당시는 짜임 형식의 목조 구조물에 직물을 사방에 두르고 장식물을 배치한 모습을 취하였다. 이는 망자를 위한 작은 공간의 의미를 지닌다. 운구 용구로는 바퀴를 달아서 이끄는 방식[車]과 어깨에 메는 방식[轝]을 사용하였다. 전자에는 유거, 재곽거(載槨車), 윤거, 지거, 상거를 예로 들 수 있으며, 후자에는 대여, 소여, 방산(方山)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거(車)의 방식으로는 유거가 가장 대표적이다. 유거는 바퀴가 달린 수레 형태로 앞에서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이끌고 나아가면서 운구하는 상구이다. 유거 전체를 떠받치는 구조물인 하체는 바퀴, 속바퀴, 가로대, 차대, 형, 횡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체는 거상(車箱)이라 하여 재궁을 싣는 부분으로 횡목과 귀기, 단주, 소주, 정판, 입주, 별갑으로 구성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대부사서인용 운구 상구로도 바퀴 달린 대여를 제시하였다. 이후에 몇몇 실학자들은 지거와 윤거, 상거 사용을 권장하였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익(李瀷, 16811763)『반계수록(磻溪隨錄)』『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대군과 사대부 상에 말이 메우는 윤거를, 소가 메는 상거의 사용을 각각 권하였다. 실제로 장지(葬地)까지 거리가 멀거나 상여꾼을 구할 수 없었던 상가는 소를 메워서 운구한 사례도 있다. 장지까지 사람이 메고 가기에 멀거나 또 수레형이 유리하면, 상주는 거 형식의 상여를 선택하였다.

여(轝)의 방식으로는 대여가 대표적이며, 유거와 방산 등으로 용어를 혼용하였다. 여는 기본적으로 장강과 횡강을 결구한 위에 본체로 난간과 지대목, 입주, 사주, 판첨 등을 결구하고, 그 위에 상장(上裝)을 배치하였다. 상가는 점차로 ‘거’ 형태에서 ‘여’ 형태의 상여를 보편적으로 선택해서 사용하였다.

고대 중국 상여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서 장식물이 달랐다. 조선시대 운구 용구는 국장용과 대부사서인용 형태가 유사하였지만, 규모에서 차이가 있었다. 국장용 상여는 견여, 대여 또는 유거를 국장도감 일방에서 제작하였다. 유거와 대여는 궁궐 외문에서 영악전(靈幄殿) 입구까지, 견여는 빈전에서 궁궐 외문까지와 영악전 입구에서 현궁(玄宮)까지 재궁(梓宮)을 운구하였다. 노면 상태가 고르지 않아서 유거로 재궁의 운구는 위험하고, 대행왕 옥체에도 좋지 않았다. 평지에서는 담배군(擔陪軍)들에게 운구의 위험이 덜하였지만, 언덕을 오르거나 고개에서 내려올 때는 한쪽으로의 쏠림 현상으로 쉽지 않았다. 따라서 운구의 어려움은 세종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국휼부터 유거를 폐지하고 어깨에 메는 대여를 사용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바퀴 달린 유거와 어깨에 메는 대여는 본체를 지지하는 하체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유거 하체는 바퀴 및 그와 관련한 구조물이고, 대여 하체는 장강과 횡강이 기본을 구성하였다. 하체는 재궁을 안치하는 소방상(小方牀)을 포함한 본체를 배치하도록 견고하게 결구하였다.

소방상은 재궁 또는 망자의 시신을 안치한 구를 배치하는 공간으로 상여에서 핵심 공간이다. 소방상은 운구하는 동안 망자를 항상 수평을 유지하도록 본체에 매달았다. 망자의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방상이 앞뒤로 흔들린다. 평지에서는 상여 본체와 소방상이 평형을 유지하지만, 오르막과 내리막길에서는 각이 수시로 변하므로 소방상의 흔들림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상여꾼들에게 자칫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상여 운구의 어려움은 필수적으로 뒤따랐다. 전인군과 후인군이 상여가 엎어지지 않도록 줄을 당겨서 균형을 맞추면서 장지까지 운구하게 함으로써 운구에 안정성을 확보했다.

재궁은 옥체를 실으며, 외재궁은 재궁의 하현궁 시에 이를 담는 상구이다. 재궁은 유거와 대여, 견여로, 외재궁은 외재궁여로 운구하였다. 외재궁여는 대여와 별도로 발인(發靷) 이전에 외재궁을 싣고 능소까지 운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재곽거로 수레 형태로 제작하여서 외재궁을, 선조국장에는 외재궁재거로 외재궁을 능소까지 운반하였다.

변천

점차로 상가는 소방상이 없는 소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소여는 민간 장례에서 규범화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상여로 불리고 있다. 하체와 본체는 동일한 형태인 반면, 상장 부분은 별갑, 와가, 반원통 모양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형태는 조선시대 국장용 대여와 견여 상장 부분 모양으로 민간에서는 소여 상장으로 수용함으로써 그 구조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구조와 장식물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변화와 함께 변하기 시작하였다. 구조는 다층화와 건축물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장식은 민화성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각종 장식물을 제작해서 상여에 부착하였다. 이 시기에는 여백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식성이 돋보이는 상여가 등장하였다. 대부분의 상여는 예법에 관한 책에서 제시한 기본적인 구조와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조선시대 전통 상여의 맥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계층을 달리해서 기존 상여와 ‘조선화된’ 상여가 함께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70년대 산업화와 공업화로 상가는 점차로 기존 형식과 다른 상여를 마련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년이 교육과 취업 등 여러 이유로 마을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면서, 주민들은 상여 운구 인력 부족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지상여(일명 꽃상여)의 사용으로 이 문제를 직접 해결했다. 이외에도 상여 업자가 철과 합성수지로 제작, 판매한 상여가 있었으나 대량으로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상주는 지상여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는 지상여가 남이 사용하지 않고 깨끗해서 좋다는 인식과 함께 어른에게 마지막으로 효도해서 마음이 뿌듯하다고 생각하였다. 상여꾼들은 무게가 가벼워서 운구하기 편할 뿐만 아니라 일회성이어서 운구 후 성분하는 동안에 주변에서 소각시켜서 마을로 돌아올 때 육체적인 부담이 없기 때문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상여는 망자 또는 상주의 종교와 사회적 위신을 반영하였다. 기독교식은 ‘十’ 표기와 성경 글귀를, 불교식은 ‘卍’을 써서 부착해서 자신의 종교적인 색채를 상여에 표현하였다. 한 저명인사 상여는 고향의 기존 상여에 국화를 장식해서 사용하였다.

개별적인 상여 구입과 운구는 자신의 가정 경제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했다. 사용 후에는 상여를 마을에 기증한 사례도 있다. 대부분 마을 주민들은 갹출을 통해 상여 제작 비용을 마련하여 목수 중심으로 마을 내에서 자체 제작하거나 전문업자에게 제작을 의뢰하였다. 이후에는 상엿집을 지어서 마을 공동 재산으로 상여를 보관하고, 손상과 보수를 반복하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다. 상가는 상여를 사용한 대가로 일정액을 마을에 지불하였고, 마을에서는 이를 모아두었다가 상여 수리와 도색, 부속품 구입, 상엿집 수리 등에 사용하였다.

주민들은 상엿집을 곳집, 행상집 등으로 불렀으며, 산 아래 등 외진 곳에 세웠다. 여기에는 상여뿐만 아니라 산역 도구와 천막도 보관하였다. 이전에는 목재 또는 토석으로 와가형, 초막형 상엿집을, 1970년대 이후에는 시멘트 블록 등으로 지어서 상여를 관리하였다. 마을 상여계 또는 마을 총회에서는 관리인을 선정해서 상여와 상엿집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상여 사용이 점차 줄어들자 주민들이 결의해서 자체적으로 상여를 태우고 상엿집을 허는 한편, 마을 미관을 위해서 상엿집을 일제 정비하고자 비용을 지원하는 지방 자치 단체도 있었다.

참고문헌

원전

『國朝五禮儀』
『宣祖國葬都監儀軌』
『磻溪隧錄』
『星湖僿說』

논문

박종민, 「한국상여의 변용과정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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