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며,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 이도(李祹)와 가례(嘉禮)를 올려 빈(嬪)이 되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개봉(改封)되고, 이듬해 4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敬嬪)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9월에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니 12월에 왕후로 봉하여 공비(恭妃)라 일컬었다.
그러나 1432년(세종 14)에 중궁(中宮)에게 미칭(美稱)을 올리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라 하여 1432년에 왕비로 개봉되었다. 심온은 세종이 즉위한 뒤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청(沈泟)이 군국대사를 상왕(上王: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한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그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되었다.
이 일로 폐비의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일축되었다. 1446년에 52세로 죽자 헌릉(獻陵)에 장사지냈다.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으로 이장하였다. 『영릉지(英陵誌)』를 예조판서 정인지(鄭麟趾)가 제술하였다. 시호는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이고, 능호는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