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석은 일반 분묘나 능원(陵園)의 봉분 앞에, 주로 정남쪽에 설치해 놓은 석물이다. 흔히 ‘상돌’이라고도 부른다. 넓적하면서도 장방형의 돌로 된 상으로 성묘할 때 그 위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능원의 상석은 크기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으나 일반사대부의 것은 일정하지 않다. 합장일 때는 두 개를 갖추지만, 한 개를 설치하기도 한다. 상석과 함께 동시에 설치되는 혼유석은 능원에는 봉분 앞에, 일반 봉분에는 봉분과 상석의 사이에 놓는다. 혼유석은 장방형의 돌로서 묘제를 지낼 때 영혼이 나와 앉아서 흠향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넓적하면서도 장방형의 돌로 된 상을 말한다. 흔히 ‘상돌’이라고도 부른다. 그 이름에 대한 한자표기는 문헌마다 각기 다른데, 조선시대 왕실의 예전(禮典)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석상(石牀)으로, 일반사대부의 대표적 예서인 『상례비요(喪禮備要)』와 『사례편람』에는 석상(石床)으로 각각 표기하고 있다.
그 숫자와 크기에 대하여 『국조오례의』에는 봉분 앞에 하나를 설치하는데, 길이 아홉 자 아홉 치, 너비 여섯 자 네 치, 두께 한 자 다섯 치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례비요』에는 합장(合葬)일 때는 두 개를 갖추지만, 한 개를 설치하기도 하는데, 크기는 편리한대로 따른다고 하였다.
따라서, 능원의 것은 크기가 일정하다고 하겠으나, 일반사대부의 것은 일정하지 않다.
상석을 설치하는 방법도 능원과 분묘가 각각 다르다. 능원은 세 개의 계절(階節)로 나누어져, 봉분과 상석, 그리고 망주석을 똑같이 상계(上階)에 설치하며, 중계(中階)에 장명등(長明燈)과 문석인(文石人), 그리고 석마(石馬)를, 하계(下階)에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를 각각 설치하고 있다.
따라서, 아래에 지대석(地臺石)을 설치한 위에 족석(足石) 네 개를 괴어 설치한다. 족석은 석상의 네 모서리를 괴는 북모양의 돌로서, 일반적으로 북석 · 6고석(鼓石)이라고도 한다. 이 족석의 형태와 크기도 규정되어 있는데, 북모양의 4면에 나어(羅魚)의 머리를 새긴다면, 높이는 한 자 다섯 치, 지름이 두 자 두 치 닷 푼의 크기이다.
그러나 사대부 분묘의 경우는 2 계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계절에 봉분과 상석을 함께 설치하거나, 계절의 계체석(階砌石)에 두 모서리를 걸치게 하여, 아래 하계절인 배계절(拜階節)에 설치하기도 하여 북석이 필요없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두 개만 필요하게 되어 있다.
상석과 함께 동시에 설치되는 것으로 혼유석(魂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있다. 혼유석은 능원에는 봉분 앞에, 일반 봉분에는 상석과 봉분의 사이에 놓는 장방형의 돌로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마련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묘제를 지낼 때 영혼이 나와 앉아서 후손이 올리는 제수들을 흠향(歆饗)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봉분 앞에 묘표(墓表)를 세울 때 혼유석은 상석과 묘표의 사이에 놓이게 된다. 향로석은 향안석(香案石)이라고도 하는데 옛말로는 석상(石床)이라고 불렀다. 흔히, 네모 반듯한 돌에 네 다리를 형식적으로 새겨 향탁(香卓)과 같이 깎아 상석 앞에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섯 모로 만든 것도 더러 보인다.
비석과 석물에 대해서도 중국과 우리 나라의 실정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사례편람』에 의하면, “『가례(家禮)』에는 묘에는 다른 석물은 없고 단지 비석만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후세사람들이 사치를 앞세워 크게 상석을 먼저 세우고자 하고, 비석은 경비관계로 세우지 않으니, 이것은 경중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비석을 먼저 세우고 다른 석물은 천천히 해도 좋다.”고 비석보다는 석물을 먼저 세우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상석과 혼유석, 그리고 향로석은 모두 묘제를 지낼 때 각각 제수(祭需)와 향로와 향합을 차리거나 올려놓는 데 쓰이고 있으나, 능원에서는 실제로 쓰이지 않고 형식적으로 설치해 놓고 있다. 그것으로 보아 상석은 묘제가 제도화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설치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묘제는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활발히 실행되었을 가능성도 찾아볼 수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