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총은 중국의 중원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도 처음부터 매장 주체 시설을 지하에 설치하고 지표에 봉분을 올리는 토총의 방식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이전에는 땅속에 널이나 덧널을 매장 주체 시설로 사용하고 지표에는 아무런 표지를 하지 않았으나 그 말기 무렵에 봉분으로 무덤을 표지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는 크게 유행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봉분으로 무덤을 표지하기 시작하면서 신분이 높은 인물들이 그 봉분을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여 점점 커지게 되었는데 진시황릉(秦始皇陵)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까지는 토총이 사용되지 않았고, 석총 계통의 고인돌과 적석총이 무덤의 주류였다. 그러나 초기 철기시대로 들어서면서 중국 전국시대의 연(燕)과 연접한 지역에 매장 주체 시설로 널무덤[木棺墓]을 채용하고 지표에 봉분을 쌓아올린 토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고분이 고조선 말기의 주된 무덤 양식이 되었다.
낙랑이 설치되면서 중원식의 덧널무덤[木槨墓]이나 벽돌무덤[塼築墓]을 매장 주체로 한 토총이 서북한 지방의 주요 무덤 양식이 되었고, 앞의 널무덤을 주체로 한 고조선 말기 토총은 서기전 2∼3세기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퍼져 주된 무덤 양식으로 자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자리한 압록강 중류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는 과거의 무덤 양식이었던 적석총이 축조되어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후 원삼국시대 후반기(서기전 150년 이후)에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낙랑에서 영향을 받은 덧널무덤을 매장 주체로 한 토총이 유행하였고,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무덤 양식이 지역별로 사용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압록강 중류역에 수도가 있었을 때는 주로 석총인 적석총을 사용하였으나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돌방[石室]을 매장 주체로 한 토총인 봉토분을 사용하였다.
백제는 초기에는 고구려와 유사한 적석총을 사용하였으나 한성(漢城) 시기 말기 즈음에 역시 돌방을 매장 주체로 한 봉토분이 채용되어 주류가 되었다.
신라는 덧널을 매장 주체 시설로 하고 그 주위와 위에 적석을 한 다음 흙을 덮어 마무리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독특한 무덤 양식을 사용하다가 6세기에 이르러 돌방을 매장 주체로 한 봉토분을 대체하여 사용하였다. 앞의 돌무지덧널무덤은 토총과 석총이 결합된 모습이다.
가야 지역의 경우는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을 매장 주체로 한 봉토분을 주된 무덤 양식으로 사용하였고 말기에 돌방을 매장 주체로 한 봉토분이 나타났다.
토총의 봉분 형태는 반구형인 원형(圓形)이 보통이나 지역과 시기에 따라 피라미드의 머리를 잘라 낸 모양인 방대형(方臺形), 두 개의 원형이 합쳐져 표주박 모양을 한 표형(瓢形), 방형의 전면에 원형의 후면을 덧붙인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등이 사용되었다.
방대형은 고구려 지역과 삼국시대 영산강 유역에서 유행하였고, 전방후원형은 삼국시대 호남지방에서 더러 축조되었다. 그외 신라와 가야, 백제 지역에서는 원형이 유행하였고, 표형은 신라의 특수한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