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시대 ()

김해 예안리 고분군 유개대부호
김해 예안리 고분군 유개대부호
선사문화
개념
우리나라 고고학 편년상 초기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사이의 시기. 삼한시대 · 철기시대Ⅱ기 · 부족국가시대 · 성읍국가시대 · 삼국시대 초기 · 삼국시대 전기.
이칭
이칭
삼한시대, 철기시대Ⅱ기, 부족국가시대, 성읍국가시대, 삼국시대 초기, 삼국시대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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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원삼국시대는 우리나라 고고학 편년상 초기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사이의 시기이다. 서기전 1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약 400년간의 기간을 이른다. 청동기의 실용성 소멸, 철기생산의 보급 및 확대, 김해토기의 출현, 벼농사의 발전, 고인돌의 소멸, 돌덧널무덤의 발달 등 문화적 특징이 나타났다. 고고학계에서는 철기시대 Ⅱ기, 역사학계에서는 삼한시대·부족국가시대·성읍국가시대·삼국시대 초기·삼국시대 전기 등으로 명명하였다. 이러한 용어상의 불편과 불합리를 줄이고 고고학계와 문헌사학계에서 모두 쓸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고고학계에서 제안한 용어이다.

정의
우리나라 고고학 편년상 초기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사이의 시기. 삼한시대 · 철기시대Ⅱ기 · 부족국가시대 · 성읍국가시대 · 삼국시대 초기 · 삼국시대 전기.
개설

원삼국시대(Proto-Three Kingdoms Period)는 초기 철기시대 이후∼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로서 서기전 1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약 400년간의 기간을 이른다. 이 시대는 서기전 100년경 한반도 북부 및 중국 동북지방 일원에서 고대국가 고구려가 성립하고 한반도 서북부에 낙랑군이 설치되며, 남부에서 도구용 청동기가 소멸하고 철기가 본격 생산되는 가운데 각 지역에 삼한 소국들이 성립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으로는 청동기의 실용성 소멸, 철기생산의 보급 및 확대, 김해토기의 출현, 농경(벼농사)의 발전, 고인돌〔支石墓〕의 소멸, 돌덧널무덤〔石槨墓〕의 발달 등을 들 수 있다. 대략 4세기경에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함으로써 원삼국시대는 종결되고 삼국시대로 진입한다.

연원 및 변천

종래 고고학계에서는 서기를 전후한 때부터 고총(高塚)이 발생하는 서기 300년경까지의 본격적인 철기시대를 김해시대(철기시대 Ⅱ기)라고 불러왔다. 반면 문헌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미 삼국시대인 이 시기를 삼한시대, 부족국가시대, 성읍국가시대, 삼국시대 전기 등으로 명명하였다.

이러한 용어상의 불편과 불합리를 줄이고 두 학계 모두 쓸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고고학자 김원용이 ‘원삼국시대’의 사용을 제안하였다. 이 용어의 명칭은 삼국시대의 원초기(原初期) 또는 원사(原史) 단계의 삼국시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최근에는 그 기점을 대개 서기전 100년경으로 올려 잡는 경향이며, ‘삼국시대 전기’라는 용어와 병행하여 사용되고 있다.

내용

원삼국시대 동안 고구려는 처음에는 환인( 졸본) 지역, 나중에는 집안( 국내성) 지역을 도읍으로 삼아 발전해나갔다. 고구려는 평지성과 산성을 짝으로 한 도성체계를 유지하였다. 졸본시대에는 평지성인 하고성자(下古城子) 또는 나합성(喇哈城), 산성인 오녀산성(五女山城)을, 국내성시대에는 평지성인 국내성, 산성인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을 각각 도성으로 하였다.

돌무지무덤〔積石塚〕을 고유 묘제로 하였으며, 이는 땅 위로 일정 높이까지 강돌 또는 산돌을 쌓고 돌덧널〔石槨〕형태의 매장부를 설치한 다음 그 주위와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만들었다. 외형은 기본적으로 위가 잘린 사각뿔모양〔方臺形〕이지만 처음에는 분구 하단에 기단이 없는 평면 원형 또는 타원형 무기단식으로 시작해서 곧 큰 돌로 한 단의 기단만 쌓은 평면 사각형 기단식으로, 다시 기단 위 분구 외면을 층단 형식으로 쌓은 계단식으로 발전하였다.

낙랑은 토축 성곽을 가진 것이 특징인데 군치(郡治) 또는 현치(縣治)와 관련된 낙랑토성( 평양), 소라리토성( 함경남도 금야) 등이 모두 강을 끼거나 해안선 가까운 곳의 평지에 입지한다. 무덤은 널무덤〔木棺墓〕, 덧널무덤〔木槨墓〕, 벽돌방무덤〔塼室墓〕의 순으로 발달하였다.

유물로는 극(戟) · 모(鉾) · 검(劍) · 칼〔刀〕 · 촉(鏃) 등의 철제 무기와 도끼 · 낫 · 쇠삽날 같은 철제 농구가 있다. 청동기는 세형 동검문화를 계승한 유물과 중국 청동기문화 계통이 있으며, 후자 가운데 노기(弩機) · 과(戈) · 모 · 검 · 촉 등의 무기와 복(鍑)이나 정(鼎) 같은 용기, 거울, 동전 등이 있다. 토기로는 원통모양 · 고배모양 · 사발모양 · 대야모양 · 시루모양 · 부뚜막모양 · 화분모양 토기, 이배(耳杯), 정, 항아리가 있다. 칠기로는 이배 · 합(盒) · 반(盤) · 안(案) · 명(皿) · 염(奩) · 협(篋) · 편호(偏壺) · 향로 등이 있다. 또 공문서를 봉한 점토에 도장을 찍은 봉니(封泥)가 있다. 와당은 고사리문, 운기(雲氣)문, 각종 문자로 장식한 것이 있으며, 벽돌은 고분과 각종 건축물의 축조에 사용하였는데 문양으로는 기하학문과 마름모꼴 문양이 많다.

한반도 중부와 서남부는 마한과 예(濊)계 집단의 영역으로 경기도 남부 이남에서는 무덤 둘레에 도랑〔周溝〕을 두른 주구움무덤〔周溝土壙墓〕이 많이 조성되었다. 반면 충청도호남 서해안 지역에서는 무덤 둘레에 도랑을 두르되 매장부는 쌓은 봉분 속에 만든 주구묘(周溝墓)가 주를 이룬다. 중부 지역, 특히 임진강한강 중 · 상류 유역에서는 돌무지 분구묘〔積石墳丘墓〕가 많은데 이는 강가 자연모래 언덕 윗부분을 다듬어 그 위에 강돌 층을 얇게 쌓고 중심부는 돌을 더 두껍게 쌓아 덧널〔槨〕을 만든 구조이다.

집자리를 보면, 중부 지역은 평면 장방형 및 육각형이나 튀어나온 출입시설이 붙어 철(凸)자 또는 여(呂)자처럼 생긴 것이 특징이며 중서부 · 서남부 지역은 출입시설이 없는 원형 또는 방형 · 장방형이 특징이다.

유물 가운데 토기는 중도식 무문토기라고도 불리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와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로 크게 구분된다. 전자는 재래 무늬없는토기 전통에 새로운 고화도 소성 기술이 더해진 것이고 후자는 철기 기술과 더불어 들어온 외래 제법의 토기이다.

철기는 쇠삽날 · 낫 · 손칼 · 끌 · 도끼 · 괭이 등 농공구와 촉 · 모 · 대도 · 극 · 찰갑 등 무기, 복 · 항아리 등 용기, 띠고리, 낚싯바늘, 못, 재갈 등으로 구분된다. 장신구로는 옥을 사용하였는데, 유리 · 천하석 · 마노 · 연옥 · 수정 · 호박 등의 재료로 만들었다. 외래 유물로는 낙랑토기 · 철경 동촉(鐵莖銅鏃) · 청동거울 · 동전 · 금박유리 · 동탁 · 청동환이 있다.

동남부 지역은 진한변한의 영역인데, 원삼국시대 직전부터 무리를 이루고 축조된 널무덤은 이 지역 곳곳에 진 · 변한 소국이 성립하였음을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널무덤은 길이 2m 내외의 구덩이를 파고 나무널을 안치한 것으로 나무널 통나무를 파낸 것과 판재로 맞춘 것이 있다. 이러한 널무덤은 2세기 중엽경에 덧널무덤로 바뀌는데 구덩이 길이가 3∼10m로 클 뿐만 아니라 철기와 토기의 부장이 두드러진다. 집자리는 초기에는 대부분이 평면에 원형이며 규모가 작다가 후기에는 방형으로 바뀌고 아주 큰 주거지도 나타난다.

이 지역 토기를 대표하는 회색 와질토기의 기종을 보면 널무덤 단계는 타날문 원저단경호, 주머니모양 단지, 쇠뿔손잡이 항아리, 보시기가 있다. 이후 덧널무덤 단계에서는 대각이 붙고 아가리가 넓거나 곧은 항아리, 화로모양토기, 고배가 있으며 오리모양토기가 낙동강 동쪽에서 출토된다. 진 · 변한 지역 철제 농공구로는 주조괭이와 판상철부가 특징이며 후자는 철 소재이기도 하다.

한편 무기는 널무덤 단계에는 철검 · 철촉이 대부분이며 덧널무덤 단계에는 고리자루 큰칼 이 나타나고 철촉과 철모의 수량이 급증한다. 고사리 장식이 가미된 철모 · 재갈 · 유자이기(有刺利器) 등이 나온다. 장신구는 역시 옥이 사용되는데, 널무덤에서는 주로 유리구슬이, 덧널무덤에서는 그 외에 수정 · 유리 · 마노 다면옥과 곱은옥〔曲玉〕, 금박유리가 나온다. 또한 다양한 칠기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외래 유물은 주로 청동기로서 전한(前漢) 및 후한(後漢)의 거울, 북방계 동물모양 장식품, 단추 · 솥 이외에 왜(倭)계 광형 동모(廣形銅矛), 야요이〔彌生〕토기가 있다.

의의와 평가

우리나라의 원삼국시대는 선사시대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역사시대로 넘어가는 과도적 시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이 시기를 고고학계에서는 철기시대 Ⅱ기, 역사학계에서는 삼한시대 혹은 삼국시대 전기로 인식하는 가운데, 한반도 서북부지역과 중부지역 그리고 남부지역 등 각 지역마다 무덤양식이나 출토되는 유물에 상이한 문화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원삼국시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힘입어 문헌사학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초기국가 형성 및 발전 단계를 유추할 수 있으므로 고고학 · 역사학 모두 이 시기를 중요하게 다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원형이 원삼국시대에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한국 고고학 강의(개정신판)』(한국고고학회, 2010)
『한국고고학개설』(김원용, 일지사, 1986)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재론」(이희준,『한국고고학보』52, 2004)
「원삼국시대에 대하여」(김원용,『고고학지』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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