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은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도성 유적으로, 네모반듯한 모양의 평지에 둘러쌓은 성으로 비정된다. 전체 둘레는 약 2.7km이다. 현전하는 석축 성벽은 4세기에 쌓아져 만들어졌는데, 3세기 중반 이후부터 도성 경관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으로 천도하는 427년까지 고구려의 도성 역할을 하였다.
국내성(國內城)이 위치한 지안 분지는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가장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기후도 농사짓기에 알맞아 '소강남'으로 불리기도 한다. 북쪽의 노령산맥에서 뻗어 내린 용산(龍山), 우산(禹山), 칠성산(七星山) 등이 지안 분지를 감싸며, 남쪽으로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압록강이 흐른다.
국내성은 네모반듯한 모양의 석축 평지성으로, 압록강과 통구하(通溝河)가 만나는 지안 분지의 중심부인 강안 충적 대지에 위치한다. 서쪽의 통구하와 남쪽의 개울을 자연 도랑못으로 삼고, 북쪽의 우산과 남쪽의 압록강을 방벽(防壁)으로 삼는다. 국내성에서 약 3㎞ 북쪽에는 환도성으로 추정되는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 자리하며, 약 4㎞ 동북쪽에는 광개토왕릉비가 서 있고, 약 4㎞ 서남쪽에서 지안고구려비가 발견되었다.
국내성은 20세기 초 이래 여러 차례 조사되었는데, 2000~2003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구조와 공간구성은 다음과 같다.
동벽 약 550m, 서벽 약 665m, 남벽 약 750m, 북벽 약 715m로, 전체 성벽의 둘레는 약 2.7km이다. 성벽은 잘 다듬은 쐐기형 돌로 가지런하게 쌓았으며, 각 모서리에는 각루(角樓)가,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치(雉)가 설치되었다. 성문은 동문 2개, 서문 1개, 북문 4개, 남문 2개 등 9개가 확인되었고, 대체로 옹성(甕城) 구조로 조성되었다.
성 내부에는 성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망으로서 동서 도로 2개와 남북 도로 3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간선도로는 성 내부를 12개 구역으로 구분하는데, 그중 중앙에 있는 제6구역에서 대형 건물지를 비롯한 대규모 건물군과 최고급 외래품이 확인되어 왕궁지로 추정된다.
한편, 12개 구역 중 대부분의 구역에서 4세기 초부터 유행한 권운문와당(卷雲文瓦當)이 출토됨에 따라 4세기 전반의 국내성 내부는 기와와 와당 등을 사용한 고급 건축물이 골고루 분포했던 지배 세력의 집중 거주 구역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국내성의 조성 연대에 관해서는 3세기경 설과 4세기경 설 등의 이견이 있다. 국내성의 석축 성벽 아래에서 한나라 시대 토성의 흔적이 확인되었다는 1984년의 발굴 보고에 따라 국내성은 한나라 시대에 처음 축조된 후 고구려가 이어 사용했다는 해석이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의 발굴 조사를 통해 세 가지 측면의 비판점이 제기되었다.
첫째, 2000년부터 2003년까지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석축 성벽 아래에서 한나라 시대 토성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석축 성벽 안쪽 흙으로 쌓은 건축물의 바닥 부분에서 성벽 축조를 위해 조성된 성토층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토층은 연천호로고루나 연천당포성 등에서도 확인된다.
둘째, 2009년과 2011년의 발굴 조사에서는 성벽 가장 안쪽 흙으로 쌓은 건축물의 기초 부분에서 출토된 토기의 조각들이 4세기 초로 편년되었다.
셋째, 성 내부의 발굴 조사 결과, 국내성 최하단부 문화층에서는 권운문와당, 동진(東晉) 대 청자 등 대체로 4세기 이후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발굴 조사에 따라 국내성의 초축 시점을 『삼국사기』 고국원왕 12년(342)의 ‘국내성 축조’ 기사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고학적 정황을 중시하는 4세기경 설이다. 한편, 비록 현전하는 석축 국내성은 4세기 이후에 축조되었더라도 지안 분지의 초대형 돌무지무덤들이 3세기 중후반부터 만들어졌다는 점, 3세기 중반에 편찬된 『삼국지』에서 고구려 도성을 '환도산 아래'라고 전하고 있는 점, 『삼국사기』 동천왕 21년(247)의 '평양성'을 지안의 평지성(국내성)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는 문헌 사료의 정황을 중시하는 점 등으로 견고한 석성 이전에 이미 도성의 경관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는 문헌 사료의 정황을 중시하는 3세기경 설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3년(유리왕 22)에 국내로 천도했다고 전하는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때부터 평양으로 천도하는 427년까지 국내가 고구려의 도성이었다고 전한다. 유리왕 대의 '국내 위나암(國內 尉那巖)'과 4세기 이후의 '국내성'을 동일시한 결과였다. 국내성이 지안의 평지성으로 추정된다면, 국내 위나암은 지안 북쪽의 산성자산성뿐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4세기 이후의 '국내성'으로 추정되는 지안 지역에서는 3세기 이전의 고구려 도성과 관련된 고고학적 물증이 확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서 묘사된 '국내 위나암'의 지형적 특징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유리왕 대의 '국내 위나암'과 4세기 이후의 '국내성'을 구분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유리왕 대 국내 위나암을 새롭게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환런의 오녀산성설과 지안의 패왕조산성설 등의 이견이 있다. 한편, 비록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더라도 문헌 사료의 '국내 위나암'과 '국내성'을 구분하기는 어렵다고 보면서 위나암성을 지안의 산성자산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