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조영동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산시 영남대학교 북측 구릉에 분포하는 삼국시대의 고분군.
이칭
이칭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경산임당유적, 경산임당지역고분군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암반굴착덧널무덤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소재지
경상북도 경산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89년 08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산시 압량면 부적리일원
내용 요약

경산조영동고분군(慶山造永洞古墳群)은 경상북도 경산시 영남대학교 북측 구릉에 분포하는 삼국시대의 고분군이다. 6기의 대형 봉토분으로 구성되었으며, 현재 모두 발굴되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발굴 결과 묘제는 암반굴착덧널무덤이라고 부르는, 암반을 굴착하여 무덤구덩이를 파고 여기에 나무덧널을 설치한 것이 주류이나, 돌무지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도 혼재한다. 대부분 봉토는 2기 이상의 고분이 연접하여 축조되었다. 피장자는 삼국시대 경산 지역 지배 집단이다.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영남대학교 북측 구릉에 분포하는 삼국시대의 고분군.
발굴경위 및 결과

‘경산임당유적’이라고 부르는 영남대학교 북측에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에는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친 다종다양한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중앙부 '성말랭이'라고 부르는 곳에 6기의 삼국시대 대형 봉토분이 분포하는데, 이것이 경산조영동고분군이다.

경산조영동고분군은 1987년 주변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1988년까지 영남대학교박물관이 주변과 함께 모두 발굴하였다. 주변에서는 이들보다 먼저 축조된 원삼국시대의 주1주2을 비롯하여 같은 시기에 축조된 덧널무덤이나 주3 등 수많은 고분이 조사되었다.

또 1995년부터 1997년에 걸쳐서는 영남문화재연구원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변에서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하는 수많은 작은 고분과 생활유적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1987년 발굴 이후 고분군의 대형 봉토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었으나, 이 고분군 서편에 분포하는 경산임당동고분군과의 통합 관리의 필요성으로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慶山 林堂洞과 造永洞 古墳群)’으로 재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또한, 이 구릉의 동쪽 끝인 경산 부적리에도 대형 봉토분으로 구성된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경산임당동고분군과 마찬가지로 이 고분군과 동일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형태와 특징

경산조영동고분군은 발굴 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6기의 봉분(CⅠ, CⅡ, EⅠ, EⅡ, EⅢ, EⅢ-8호)이 복원되어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6기의 봉분은 단독분이 1기(EⅢ-8호)이고 2기가 연접된 것이 3기(CⅠ-1,2호, CⅡ-1,2호, EⅠ-1,2호), 3기가 연접된 것이 1기(EⅢ-2,3,4호), 7기의 고분이 연접되어 초대형의 봉분을 이룬 것이 1기(EⅡ-1∽7호)이다.

연접 상태는 경산임당동고분군과 같이 앞선 고분을 일부 헐거나 그대로 두고 연접시켰다. 묘제도 암반을 굴착하고 그 안에 나무덧널을 설치한 것이 주류이나 주4주5, 주6도 함께 확인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의 경우 암반을 굴착한 무덤구덩이 속에 덧널을 설치하고 그 주위 사방에 냇돌을 채운 것으로 앞의 주류 고분과 달리 으뜸덧널에 돌뚜껑을 하지 않았다.

묘제의 축조 서열은 돌무지덧널이 가장 이르고 암반굴착식의 덧널과 돌덧널이 다음이나 돌덧널무덤은 일시적이고, 나중에 돌방무덤이 발생하여 암반굴착식과 함께 사용되었다. 무덤의 규모, 묘곽의 배치 방식 등은 모두 경산임당동고분군과 비슷하다.

의의 및 평가

비록 도굴의 피해를 많이 입었으나 경산임당동고분군과 같이 주인공은 금동제의 관과 관식, 은제 관식, 금제 귀걸이, 은제 허리띠, 곱구슬을 매단 유리목걸이, 금제나 은제의 반지와 팔찌, 금동제 신발 등의 회려한 장신구와 금동장이나 은장의 큰칼 등을 차고 있었다.

고분군에서는 이외에도 각종의 마구류, 무기류, 철공구류, 토기류 등 수천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경산임당동고분군과 같이 피장자와 순장자의 인골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당시 사회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각 고분의 순장자는 적으면 2인, 많으면 6~7인 정도이다.

피장자는 4∼6세기에 걸쳐 경산 지역의 지배 집단의 역할을 한 인물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이전에 이곳에 존재하였던 압독국(押督國) 또는 압량소국(押梁小國)이 신라에 병합된 후 지방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ⅩⅤ-조영EⅡ-4호분 외』(영남대학교박물관, 2019)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ⅩⅣ-조영EⅡ-3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2017)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ⅩⅢ-조영EⅡ-2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2016)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Ⅻ-조영EⅡ-1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2015)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Ⅺ-조영EⅢ-4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2014)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Ⅹ-조영EⅢ-3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2013)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Ⅸ-조영EⅢ-2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2012)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Ⅴ-조영EⅠ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2000)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Ⅳ-조영CⅠ · CⅡ호분』(영남대학교박물관, 1999)
김용성, 『신라의 고총과 지역집단-대구·경산의 예』(춘추각, 1998)
『경산 임당지역고분군Ⅱ-조영EⅢ-8호분 외』(영남대학교박물관, 1994)
주석
주1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넣거나 목관이나 목곽에 시체를 넣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무덤.    우리말샘

주2

관을 넣어 두는 널방을 나무로 만든 무덤. 평양 부근의 낙랑 고분, 경주 부근의 신라 고분이 이에 속한다.    우리말샘

주3

지면을 깊게 파고 자갈 따위의 석재(石材)로 덧널을 만든 무덤. 삼국 시대에 사용했으며 널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말샘

주4

돌로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려 봉토를 만든 무덤. 널길이 달려 있고 천장 구조가 다양하다.    우리말샘

주5

주검을 위에서 수직으로 넣도록, 옆으로 트인 창이나 입구 없이 돌로 네 벽을 짠 무덤.    우리말샘

주6

지하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에 목곽을 짜 놓고 사람 머리 크기의 강자갈을 덮은 후 다시 그 위에 점토 따위의 흙을 입혀 다진 무덤. 신라 특유의 것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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