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61-6번지 일대의 한강변 충적대지에 위치한 백제 전기의 돌무지무덤이며 1975년 5월 27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백제 전기의 다양한 묘제 가운데 하나로서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에 기원을 두고 있다. 3세기 중엽 경부터 백제 한성시대 최고 지배세력에 의해 수십 기가 축조되었지만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
1911년 9월 18일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져서 백제시대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고 보존 순위 두번째인 ‘을(乙)’ 등급이 부여되었다. 1916년 가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돌무지무덤’과 ‘토총’으로 구분되었으며, 같은 해에 간행된『조선고적도보』제3권의 ‘석촌부근백제고분군분포도’를 보면 ‘갑총’(흙무덤) 23기와 ‘을총’(돌무지무덤) 66기가 수록되어 있어서 석촌동 일대에는 1916년 이전까지 최소 89기의 고분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잠실지구 개발과 관련하여 1974년 가을 석촌동 3호분과 4호분이 발굴되었으며, 1976년까지 3차에 걸쳐 잠실지구 고분들이 발굴되었다. 1983년부터는 백제고분로의 공사와 관련되어 석촌동 3호분과 그 일대가 조사되었고, 1987년에는 인근의 민가들이 철거되면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백제고분공원이 조성되었다.
1호분은 북분과 남분이 연결된 전체 길이 22.3m 규모의 쌍분이다. 남분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이지만 북분은 현지화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이다. 1987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남분의 돌덧널[石槨]에서 귀후비개로 추정되는 은제품이 출토되었다.
2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17m 내외의 규모이고 3단을 이룬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서 1987년에 이루어진 시굴조사 시 나무널[木棺]1기에서 단경호(短頸壺)와 철도자가 출토되었다.
3호분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으로서 3단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몇 단이 더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83년에 이루어진 시굴조사에서는 3단 외곽에서 부장곽으로 추정되는 돌덧널이 조사되었으나 이미 도굴된 상태였으며 주변에서 4세기대의 중국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1986년에 이루어진 기단부 조사를 통해 가로 50.8m, 세로 48.4m 규모임이 확인되었으며 금제영락과 옥연마석 등이 출토되었다. 규모와 시기로 보아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4호분은 3단으로 구성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이다. 한 변의 길이는 17.2m이고, 전체 높이는 2.1m이다. 1974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3단 정상부에 굴식 돌방[橫穴式石室]이 윤곽만 상징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1984년에 이루어진 정비복원을 위한 조사에서는 돌방의 윤곽이 있었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기존의 분구묘(墳丘墓)를 다듬어서 돌무지무덤으로 만든 특수한 무덤임이 밝혀졌다.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 현지화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제식 돌무지무덤은 외형만으로는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계단식 적석부 내부가 돌로 구성되고 돌덧널이나 돌방이 매장주체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는 달리 계단식 적석부 내부가 흙으로 구성되고 나무널을 매장주체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는 그 피장자의 계통이 서로 구분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석촌동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은 백제 건국세력이 고구려계 이주민임을 입증해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석촌동 일대에서 돌무지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3세기 중엽 경으로 추정되며 이는 백제가 본격적인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잡은 시기를 말해주고 있다.
석촌동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 가운데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은 온조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이주민이 백제의 최고지배세력을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현지화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은 돌무지무덤 내부를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돌 대신 흙을 채운 것이 아니라 기존 분구묘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의 요소를 채용한 것이다. 2호분의 시굴조사를 통해 2호분이 기존의 나무널을 가진 소규모 무덤을 포함하여 새로이 대규모의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4호분 역시 기존의 분구묘를 다듬어서 돌무지무덤으로 만든 특수한 무덤임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백제식 돌무지무덤의 주인공들이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내려오기 전부터 분구묘를 사용하였던 현지의 선주민이었음을 말해주는 한편 고구려계 이주민에 의해 백제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가 건국과정에서 마한으로부터 동북 백여 리의 땅을 빌었다는『삼국사기』기록을 감안해보면 한강유역에서 백제 건국 이전부터 분구묘를 사용하고 있었던 선주민들은 넓은 의미에서 마한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식 돌무지무덤을 비롯한 석촌동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들은『삼국사기』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해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