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방이동 고분군 (서울 )

고대사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이칭
이칭
방이동백제고분군, 방이동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9년 12월 28일 지정)
소재지
서울 송파구 방이동 산47-4번지
내용 요약

서울 방이동 고분군은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이 무덤은 모두 굴식돌방무덤으로 8기가 있다. 6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으며 현재는 복원공사를 통해 고분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 보기 드문 군집된 돌방무덤이며 6호분의 경우 쌍실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백제고분으로 알려졌으나 신라토기가 출토되어 신라고분설이 나오면서 백제고분설과 신라고분설이 대립하고 있다.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서울 방이동 고분군은 시기적으로나 구조적으로 6세기 후반대의 신라 주변 지역의 돌방무덤들과 관련되어 있다.

정의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개설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일대의 구릉지대에 위치하며 모두 8기로 구성된 삼국시대의 고분군이다. 1917년 9월 방이동의 고분들이 처음으로 확인되어 백제 초기의 유적으로 보고되었다.

1976년에는 8기 가운데 3기가 처음으로 발굴조사되었으며, 1979년 12월 2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3년서울특별시가 복원공사를 실시해 지금의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일반적으로 굴식 돌방[橫穴式 石室]이 주류를 이룬 백제고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1976년에 3기가 발굴된 후 백제고분설과 신라고분설이 대립되어 있다.

내용

제1호분은 남북 장축의 굴식 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墳]이며 봉분의 크기는 지름 12m, 높이 2.2m이다. 돌방은 길이 3.1m, 너비 2.5m, 높이 2.1m이며 바닥에는 주1가 마련되어 있다. 1973년 주민에 의해 토기 3점이 신고된 바 있다.

제2호분과 제3호분은 발굴을 하지 않아 내부구조는 알 수 없지만 봉분의 크기는 제2호분이 지름 13.4m, 높이 2.7m이고, 제3호분이 지름 13.1m, 높이 2.9m이다. 봉분의 일부에는 주2이 남아 있다.

제4호분은 봉분 지름 13m, 높이 2.3m이다. 돌방은 남북방향으로 할석으로 축조하였으며 남북 2.34m, 동서 2.57m 크기이다. 돌방 벽에는 석회를 발랐으며 바닥에는 배수구를 파고 자갈을 깔았다. 쇠못을 박은 나무널을 안치하였으며 자연유가 있는 주3과 고배 뚜껑이 출토되었다.

제5호분은 방이동고분군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봉분은 지름 9m 정도이며 동서 방향의 돌덧널[石槨]을 가지고 있다. 돌덧널의 크기는 동서 2.01m, 남북 1.42m이다. 바닥에는 자갈을 깔았다. 유물은 회색 경질고배, 자연유가 있는 회색 경질토기병(硬質土器甁) 등이 출토되었다.

제6호분은 방이동고분군에서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의 크기는 지름 10.6m, 높이 2.1m이다. 돌방이 서쪽 주실과 동쪽 부실로 구분되어 있다. 돌방 바닥에는 판석을 깐 뒤 그 위에 자갈과 진흙을 섞어 깔았다. 유물은 회청색 경질고배가 출토되었는데 전형적인 신라토기에 해당한다.

특징

서울특별시 지역에서 보기 드문 군집된 돌방무덤이며 6호분의 경우 쌍실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대부분 도굴되어 출토유물이 많지 않지만 전형적인 백제유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방이동고분군은 돌방무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랫동안 백제고분으로 알려져 오다가 1976년의 발굴조사 이후 출토된 신라토기로 인해 신라의 고분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인근의 가락동 3호분 역시 경주 충효동 6호분 출토품과 상통하는 토기가 출토되어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관련된 신라고분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방이동고분군을 비롯한 서울특별시 강남 지역 돌방무덤들이 백제에 속하는 것이라면 백제 한성시대 말에 돌방무덤이 수용되어 백제 웅진시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백제 한성시대 지배세력의 묘제는 돌무지무덤이었다가 웅진시대부터 돌방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서울특별시 지역의 돌방무덤을 구조상 두 가지 계통으로 구분하여 가락동 3호분은 송산리 계통이며 6세기 전반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방이동 1호분은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에 편입된 다음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인해 한강유역을 상실했던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다음 다시 한강유역으로 진출해서 한동안 한강유역을 차지했다가 신라에 빼앗긴 역사적 사실과 상통하면서 그동안 가락동 · 방이동의 돌방무덤 모두를 일방적으로 백제의 것이라거나 신라의 것으로 보려고 하였던 기존의 견해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여전히 방이동 돌방무덤을 포함한 서울시 강남 지역 돌방무덤 모두가 백제 한성시대에 축조되었으며 신라토기가 출토되는 것은 후대에 신라인들이 재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방이동 돌방무덤들은 시기적으로나 구조적으로 6세기 후반대의 신라 주변 지역의 돌방무덤들과 관련되어 있다.

참고문헌

『잠실지구유적발굴보고』(잠실지구유적발굴조사단, 1976)
「(한성백제)장묘문화」(임영진,『한성백제사』5, 2008)
「백제초기 한성시대 고분에 관한 연구」(임영진,『한국고고학보』30, 1993)
「삼국시대 횡혈식석실분의 계보와 편년 연구」(조영현,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0)
「방이동 고분군」(김병모,『고고학』4, 1977)
「백제초기고분에 대한 재고」(김원룡,『역사학보』62, 1974)
주석
주1

무덤 안에 시신을 안치하는 대(臺). 우리말샘

주2

능이나 묘의 둘레에 돌려 쌓은 돌. 우리말샘

주3

접시에 높은 굽을 붙인, 고대 식기의 하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해ㆍ경주 등지에서 많이 발굴된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임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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