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대안리 고분군 ( )

나주 대안리 고분군
나주 대안리 고분군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독무덤 ·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이칭
이칭
대안리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전남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103번지
정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독무덤 ·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개설

나주시 반남면에는 자미산(紫微山)을 중심으로 한 지름 2.5㎞ 범위 내의 구릉에 약 30여 기의 고분들이 흩어져 있는데, 그 중 한 무리가 대안리고분군이다.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다니이〔谷井濟一〕와 아리미쓰〔有光敎一〕에 의해 실시되었다. 광복 후에는 1978년 5월부터 최몽룡(崔夢龍)에 의해 모두 3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고분군은 아리미쓰의 실측도에 의하면 본래 12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개간 등으로 일부가 사라지고 제1∼4호분, 제7∼9호분 등 모두 7기가 남아 있으며, 제4·8·9호분 3기만 발굴조사되었다.

이 고분군은 본래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에 인접한 고분군과 통합되어 사적 ‘나주 반남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내용

발굴조사된 3기 중 제4호분은 1978년 5월 조사시 제5호분으로 알려졌으나 다시 제4호분으로 정정되었다. 이 고분은 대안리 입구의 도로변 오른쪽 구릉에 위치해 있는데, 1978년 최몽룡이 실시한 발굴에서 돌방무덤〔石室墳〕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봉토(封土)를 가진 원분(圓墳)으로 추정되며, 돌방은 두께 8㎝ 정도의 판석(板石) 21매로 된 백제 말기의 납작천장식〔平天障式〕으로 밝혀졌다. 장축방향은 남북이고, 남쪽으로 널길〔羨道〕이 나 있다.

크기는 널방이 길이 218㎝, 너비 100㎝, 높이 103㎝이고, 널길은 길이 128㎝, 너비 103㎝, 높이 89㎝이다. 바닥에 길이 214㎝, 너비 75㎝, 두께 8㎝의 장방형 판석을 동쪽에 치우치게 깔아놓았다. 널방과 널길 사이에 1장의 문짝〔門扉〕이 있고 널길 입구는 2장의 판석으로 막았다.

돌방의 특징은 배수시설 없이 널방 바닥에 가는 모래가 섞인 황색 점토를 깔고, 돌방 주위에 누수방지를 위해 회색 점토를 발라서 배수시설과 같은 효과를 낸 것이다. 출토된 유물은 긴목항아리〔長頸壺〕·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은장도조각·금실〔金絲〕·쇠못〔鐵釘〕·철고리·사람뼈조각 등이 있다.

제8호분은 대안리 입구 왼쪽 구릉, 즉 제5호분 건너편에 있어, 제9호분과는 도랑〔湟〕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이 고분은 다니이에 의해 발굴되었다. 봉분형태는 절두방대형분(截頭方臺形墳)으로, 크기는 긴 변 10m, 짧은 변 9m, 높이 1.5m이다. 봉토 안에서는 4개의 독〔甕棺〕이 북침(北枕)으로 있었고, 잔(盞)과 작은옥〔小玉〕이 출토되었다.

제9호분도 다니이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이 고분은 대안리고분군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주위에 도랑이 있는 절두방대형분이다. 크기는 긴 변 39m, 짧은 변 31m, 높이 5.1m이다. 서침(西枕)이 4기, 북침이 4기, 머리방향〔枕向〕을 알 수 없는 1기 등 모두 9기의 독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은 을관(乙棺)에서 마구(馬具)의 장식 꾸미개〔金具〕로 생각되는 길이 13.9㎝와 15.2㎝의 금동판금구 2점, 곱은옥〔匈玉〕3점, 대롱옥〔管玉〕1점, 유리소옥 2줄〔連〕등이 출토되었다.

또 경관(庚棺)에서 길이 3.3㎝, 너비 1.4㎝의 직호문녹각제도자병(直弧文鹿角製刀子柄) 1개, 구리팔찌〔銅釧〕3점, 곱은옥 3점, 대롱옥 14점, 구슬옥〔丸玉〕2점, 북옥〔臼玉〕294점, 금고리〔金環〕등이 출토되었다.

특징

대안리고분군은 제4호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독무덤〔甕棺墓〕으로, 봉분 형태는 원분·네모무덤〔方形墳〕·절두방대형분의 3종류가 있다. 이 고분은 한 봉분 안에 여러 개의 독이 시대를 달리해 안치되어 있어, 피장자들이 모두 한 가족인 가족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독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피장자는 이 지방의 강력한 토착세력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대안리고분군의 축조연대는, 독무덤이 나오는 고분의 경우 토착집단이 이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3세기부터 5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며, 돌방무덤은 이보다 늦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경으로 편년된다. 이 시기는 백제왕실이 부여로 천도하면서 지방세력을 통제하고자 군방제(郡方制)를 실시, 중앙관리가 지방에 파견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무덤과 돌방무덤이 모두 토착세력가의 무덤이라면 서로 판이한 계통의 무덤이 동시대 혹은 동일집단의 고분으로서 한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고분군은 당시 마한과 백제의 세력구명에 중요한 고고학적인 자료가 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나주 반남 고분군」(서성훈·성낙중, 국립광주박물관, 1988)
「영산강하류지역의 고분군」(이영문,『나주 대안리5호 백제석실분 발굴조사보고』, 나주군, 1978)
「나주반남면 대안리5호 백제석실분 발굴조사보고」(최몽룡·이청규·노혁진,『문화재』12, 1978)
「羅州郡潘南面古墳群」(穴澤和光·馬目順一,『古代學硏究』70, 1973)
「昭和十三年度古蹟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40)
「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20)
집필자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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