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창암리 고분 ( )

고대사
유적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움무덤. 토광묘.
이칭
이칭
창암리고분
정의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움무덤. 토광묘.
개설

1977년 4월 한식날 한 주민이 이장 작업을 하던 중에 우연히 유물을 발견하고 신고하였는데,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해 현지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사 당시 유구(遺構)는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따라서 매장구조와 유물의 출토상태는 현지 주민의 증언을 바탕으로 해서 작업 당시의 상황을 추측할 수 밖에 없다.

내용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지표에서 약 40㎝ 가량 밑에서 토기 2점의 아가리부분이 동서로 가지런히 나타났고, 토기의 바닥이 드러나면서 바로 옆에서는 고리가 서쪽으로 향한 철제 고리자루큰칼[鐵製環頭大刀] 1점과 다른 철제유물들이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삭토과정에서 돌로 쌓은 구조물 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출토부위가 주위의 황갈색 사질토와는 달리, 검고 미세한 부식토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 유구가 원래 움무덤[土壙墓]이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무덤의 장축은 동서방향이고 고리칼(고리자루칼)의 자루가 서향이었던 점으로 보아, 피장자의 머리방향은 서침(西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크기가 다른 토기 2점과 고리칼을 비롯한 4점의 철제무기와 이기류들이었다. 토기는 둥근바닥짧은목항아리[圓底短頸壺]들이다.

1점은 몸통 전면에 삿무늬[繩蓆文]와 빗살문무늬[斜格文]가 나타나 있으며 어깨부위에는 간격이 일정치 않은 몇 줄의 가로금[橫線]을 촘촘히 돌렸으며, 높이는 18.2㎝이다. 다른 1점은 아무런 무늬나 장식없이 어깨 양쪽에 조그만 혹이 돌출되어 있으며 높이는 30㎝이다.

철기류 중 고리칼은 칼등이 곧게 뻗고 날쪽은 칼끝에 이르면서 차차 좁아진다. 잘록한 손잡이 부분은 타원형의 고리에 이르면서 더욱 좁아지고 네모난 단면을 이루었고 길이는 58㎝이다. 이밖에 도끼·창·낫 등 각 1점씩의 철제유물이 한꺼번에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창암리고분은 백제고분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철기류 일괄유물이 출토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미 발굴조사된 서산시 대산면의 움무덤에서 출토된 철제유물이나 토기의 형식·종류는 이곳 창암리 출토의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같은 서해안지방이라는 지리적 배경과 함께 그 원류와 계통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3∼4세기대까지 마한·백제의 영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덤양식은 움무덤이다. 마한·백제영역 내의 움무덤군은 석촌동 하층고분군, 천안 청당동·화성리, 청주 송두리·송절동·신봉동, 화순 용강리, 승주 요곡리고분군 등이 있다. 창암리 움무덤의 조성연대 역시 이들 고분군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본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류나 토기류들도 함께 고려한다면 늦어도 4세기에는 움무덤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충남지역의 문화유적』(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6)
「충남해안지방의 백제고분」(지건길,『백제문화』10, 1977)
집필자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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