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고분 ( )

서울 석촌동 1호분 발굴 모습
서울 석촌동 1호분 발굴 모습
고대사
유적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
내용 요약

백제 고분은 고구려나 신라·가야와 달리 고유한 특성을 갖춘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있는 백제의 무덤이다. 백제고분은 특유의 기단식 돌무지무덤, 널·덧널움무덤, 분구 움무덤, 돌덧널무덤 등이 있고 그 외 돌방무덤과 중국의 벽돌무덤 축조 방식을 도입한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서울석촌동고분군, 천안용원리고분군, 연천문호리고분, 부여능산리고분군이 대표적이다. 중앙과 지방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던 백제의 묘제는 6세기 이후 중앙정치세력의 성장과 함께 모두 굴식 돌방무덤으로 통일된다. 고분의 변화가 백제의 정치·사회상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의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서기 전후에서 7세기 후반경까지 고대국가로 존속하였던 백제의 고분문화는 건국 초기에는 삼한사회의 전통에 머물러 있었지만 국가체제를 갖춤과 더불어 백제 특유의 고분문화가 성립하여 이후 다양한 변화 · 변천이 나타났다.

백제의 고분들은 편의상 움무덤[土壙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무지무덤[積石塚], 독널무덤[항아리무덤: 甕棺墓], 돌방무덤[石室墳], 기타로 구분하여 약 18가지의 유형으로 구분된다. 이들 고분들은 도읍지역과 지방, 그리고 시기별로 변화 · 변천이 크게 이루어졌다.

도읍지역의 경우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지방사회는 흙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등의 토착묘제가 도읍지역에 유입된 돌방무덤으로 변천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백제의 정치 · 사회상의 발전과 짝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결국 도읍지역에 중앙 지배층의 묘제로 수용된 굴식[橫穴式] 돌방무덤이 백제묘제로 정착되고 난 이후 중앙의 지방 장악과 병행하여 확산되어 백제 전 사회의 보편적 묘제로 자리하게 되었다.

내용

백제고분은 백제라는 고대국가가 건국되어 멸망하기까지의 기간에 걸쳐 그 영역에 존재하였던 고분이다. 주1적으로 토장(土葬)을 원칙으로 하면서 시신을 직접 묻는지, 주2적 방식인 세골장(洗骨葬)을 실시하는지, 아니면 화장 후 유골을 수습하여 묻는지 등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차장(一次葬)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더불어 고분을 만드는 방식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토장을 전제하면서 매장시설의 위치와 사용된 재료, 그리고 매장부의 형상 차이 등에 따라 다양한 유형 구분이 이루어진다. 백제고분의 종류는 편의상 움무덤, 돌무덤, 독널무덤(항아리무덤), 돌방무덤, 기타로 구분할 수 있고, 먼저 움무덤은 순수 움무덤, 널 · 덧널움무덤[棺槨土壙墓], 주구 움무덤[周溝土壙墓], 분구 움무덤[墳丘土壙墓]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모두 주3을 조성한다는 공통성 외에 주4 조성 과정에서 주5가 시설되었는가, 매장부의 위치, 그리고 매장시설로 널(棺) · 덧널(槨)의 존재 여부에 따라 구분한다.

순수 움무덤은 서울시 석촌동고분군에서, 널 · 덧널움무덤은 천안 용원리고분군청주 신봉동고분군이 대표적이고, 분구 움무덤은 서산의 기지리부장리고분군을 꼽을 수 있다. 돌무덤은 기단식 돌무지무덤, 돌무지무덤, 구덩식[竪穴式]돌덧널무덤, 앞트기식[橫口式] 돌덧널무덤, 굴식 돌방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등이 있다.

축조재료로 석재가 사용된 것을 모두 포함한 것인데 외부를 석축하였는가 아니면 지하 묘광에 무덤방을 석축하여 만들었는가에 따라 돌무지무덤과 돌덧널무덤 계통, 그리고 돌방무덤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서울시 석촌동고분군, 돌무지무덤은 연천 문호리고분이 대표적이다.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화성 백곡리고분군논산 모촌리고분군에서, 그리고 앞트기식 돌덧널무덤은 논산 도구머리고분군이 대표적으로 확인된다.

굴식 돌방무덤은 서울시 가락동, 공주 웅진동, 부여 능산리고분군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부여 염창리고분군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독널무덤은 움독널무덤[土壙甕棺墓] · 돌덧널독널무덤[石槨甕棺墓] · 굴독널무덤[橫穴甕棺墓] · 분구독널무덤[墳丘甕棺墓]등의 유형이 있다. 이 묘제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한반도에 나타나 다양한 형태로 존속되었으며, 백제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사용된 묘제이나 나주 반남면 일대의 분구독널무덤 이외에는 대체로 배장묘(配葬墓)로서 사용되었다.

기타 묘제는 백제묘제로서 보편성보다 오히려 특수성이 크게 강조되는 것들인데, 그 분포나 존속기간이 한정적이다. 부여 중장리에 있는 화장묘(火葬墓),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벽돌무덤[塼築墓], 서산 여미리고분군의 기와널무덤[瓦棺墓], 공주 단지로고분군의 굴무덤[橫穴墓]이 이에 속한다.

백제고분의 묘제적 다양성은 크게 돋보이며, 그러한 다양성은 사용 주체의 문화적 다양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묘제의 고분들은 백제의 성장 · 변천과 함께 변화하였다. 묘제가 변화하는 양상은 각 지역의 토착적 전통 묘제 위에 새로운 묘제가 도입되거나, 묘제 간 결합을 통해 새로운 유형이 창출되는 식이었다. 특히 적극적 대외교섭을 통한 활발한 신문물의 도입과정에서 새로운 고분형태도 등장하였다.

백제고분의 변화는 도읍지역과 지방사회가 상호 유기적 관련 속에 5단계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백제가 건국되어 고대국가 체제로 진입하기까지의 초기는 아직 백제적 색채를 띠는 고분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단계로, 삼한의 고분문화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3세기 말경에서 4세기 중 · 후반까지의 전기 단계에서는 도읍지역에 돌무지무덤 특히 기단식 돌무지무덤이 등장하고, 지방사회에 움무덤과 돌덧널무덤 및 독널무덤 등의 다양한 백제고분들이 등장하면서 고유한 고분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중기는 4세기 중 · 후반경에서 5세기 중반까지인데, 굴식 돌방무덤이 백제사회에 유입되고 그것이 이전 단계의 묘제와 병행하여 사용되면서 점차 확산되어 백제 고분문화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 단계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도읍지역에서 일정 기간 기단식 돌무지무덤과 병행하여 사용되다가 5세기 중반 무렵에 기단식 돌무지무덤을 구축하고 백제 유일의 묘제로 자리매김하는 특징을 보인다. 반면에 지방사회는 토착적인 전통묘제가 강화되면서 고총고분으로 발전하지만, 부분적으로 굴식 돌방무덤의 유입도 나타난다.

후기는 도읍지역의 중심 묘제로 굴식 돌방무덤이 자리하면서 기단식 돌무지무덤이 자취를 감추고, 굴식 돌방무덤도 자체 변천을 거쳐 백제적인 것으로 정착되는 기간인데,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 무렵의 웅진도읍기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서 백제 고분문화의 변화는 부분적으로 정체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특히 지방사회는 중기의 묘제 환경이 힘겹게 고수되거나 자취를 감추는 등의 이상 징후가 포착된다. 그러나 후반 무렵에 중국의 벽돌무덤이 도입되어 사용되고 그것이 백제 돌방무덤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말기는 6세기 초 · 중반경부터 멸망 때까지인데, 이 시기 묘제의 가장 큰 특징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묘제가 통일되고 굴식 돌방무덤의 구조 · 형식적 정형이 성립했다는 점이다. 돌방무덤은 처음 백제사회에 유입되어 일정한 형식 변화가 나타나 주6 혹은 아치식으로 정립되었지만 다시 자체적인 형식변화를 거쳐 평천정(平天井)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더불어 지방사회는 기존의 전통적 토착묘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굴식 돌방무덤만 사용된다.

말기 단계에서 굴식 돌방무덤 이외에 화장묘, 독무덤 등도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7세기경에 이르면 굴식 돌방무덤도 합장 혹은 다장(多葬)의 기능이 추가되어 전통적 장법 상에 변화가 나타나고 그로 말미암아 앞트기식 돌방무덤이라는 새로운 묘제가 등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백제는 백제만의 고유한 특성을 갖춘 고분문화를 영위하였다. 고대 삼국 중의 하나인 백제의 고분은 고구려신라 · 가야의 묘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고구려 묘제는 돌무지무덤과 봉토 돌방무덤, 신라 · 가야의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 · 움무덤이나 돌덧널무덤이 주종을 이룬다.

반면에 백제의 묘제는 특유의 기단식 돌무지무덤, 널 · 덧널움무덤, 분구 움무덤, 그리고 돌덧널무덤 등을 사용하였고 그 외에 일찍부터 돌방무덤을 조영하는가 하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벽돌무덤 축조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백제 고유의 고분문화를 갖추게 되었다. 나아가 백제의 고분문화는 그 다양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고분들이 결국에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통일된다는 문화전개의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백제의 고분문화는 중앙정치세력의 성장과 함께 중앙 · 지방 가릴 것 없이 주묘제로서 굴식 돌방무덤으로 묘제가 단일화되는데, 이는 고분문화의 변화가 정치 · 사회 환경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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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무령왕릉』(김원룡·윤무병·강인구·안승주·이남석 외, 충청남도·공주대학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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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발굴조사보고서』(문화재관리국, 1973)
「백제고분양식의 일례」(안승주, 『백제문화』 1, 1967)
「백제고분의 연구」(안승주, 『백제문화』 2, 1968)
「백제의 화장묘」(강인구, 『백제문화』 7·8합집, 1975)
「백제고분의 연구」(안승주, 『백제문화』 7·8합집, 1975)
「백제의 화장묘」(강인구, 『미술자료』 17, 1974)
「임실 금성리 석곽묘군」(김영래, 『전북유적조사보고』 3, 1974)
「논산육곡리의 백제고분과 출토유물」(강인구, 『고고미술』 121·122, 1974)
「고부 은선리 고분군」(전영래, 『전북유적조사보고』 2집, 1973)
「백제옹관묘의 일형식」(강인구, 『백제문화』 6, 1973)
「백제의 화장묘」(강인구, 『고고미술』115, 1972)
「백제고분문화의 연구」(안승주·박병국, 『백제문화』 5, 1971)
「서산 대산면 백제토분묘의 발굴보고」(김영배·한병삼, 『고고학』3, 1969)
「枾木洞古墳調査」(安承周, 『百濟の考古學』, 1972)
「公州地方の百濟古墳」(安承周, 『百濟の考古學』, 雄山閣, 1972)
주석
주1

장사를 지내는 방식과 제도. 토장(土葬), 화장(火葬), 수장(水葬), 풍장(風葬), 조장(鳥葬) 따위의 장법(葬法)과 사후의 제사가 포함된다. 각 겨레가 지니는 사생관, 영혼관, 내세관 따위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다.    우리말샘

주2

장사를 지내고 일정 기간 뒤에 시신을 다시 옮겨 묻는 일.    우리말샘

주3

무덤 칸이나 곽 또는 관을 넣기 위하여 판 구덩이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듦. 또는 그 무덤.    우리말샘

주5

무덤 주위를 둘러 판 도랑.    우리말샘

주6

아치에서 발달되어 조적(組積), 돌, 콘크리트 따위의 재료로 반원형을 가지는 곡면 구조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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