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용원리고분군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고분유적으로 토광묘(土廣墓) 137기, 석실분(石室墳) 13기, 옹관묘(甕棺墓) 2기 등 고분 149기와 주거지(住居址) 1기가 조사되었다. 이들 유구가 조사된 범위는 총 7,000여평의 면적으로, 경작지 및 도로의 개설 등으로 훼손된 면적을 포함한다면 유구는 잔존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유적의 분포는 지형에 따라 분포양상을 달리하는데 특히 북향사면에 유구의 약 80%가 밀집하고 있다. 유적은 구릉을 중심으로 137기의 토광묘와 수혈식석실분 8기, 옹관묘 2기, 주거지 1기 등이 밀집된 형상을 취하며 나아가 규칙적으로 배열을 이루어 구릉의 방향에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이로 열을 이루고 있다. 다만 석실분 4기는 구릉 중심의 동쪽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고, 1기의 석실분이 남쪽의 독립된 구릉상에 따로 떨어져 있는 차이를 보인다.
우선 토광묘의 경우 설상대지(舌狀台地)의 구릉 북향사면을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으며 능선의 방향을 맞추어 열을 이루며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일정한 계획하에 유적의 무덤군이 조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서로 중복됨이 없이 규칙성 있게 배치되었으며 두향이 서향으로 일률적인 면이 주목된다.
석실분의 경우 토광묘와 비록 묘제의 유형은 차이가 보이지만 유물의 부장 방식이나 내용에서 서로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유물의 조합상에서 토광묘와 큰 차이가 없으며, 나아가 토광묘와 혼재된 형태로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묘제의 조영집단은 동일하되 단지 시간적 선후 혹은 피장자의 위치에 우열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현재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유물의 조합상 토광묘가 선행하며, 수혈식석실분이 뒤에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부장품으로 석실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흑갈유계수호(黑褐釉鷄首壺)를 포함한 다량의 토기와 철기 및 금제이식(金製耳飾), 옥류(玉類)가 있다. 토기는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와 함께 약 350여점에 이르며 다양한 기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기의 경우 무기류인 금동제(金銅製)의 단봉문환두대도(單鳳文環頭大刀), 은상감대도(銀象嵌大刀)를 비롯하여 철모(鐵鉾), 철촉(鐵鏃) 등과 등자(登子)를 포함한 마구(馬具)들이 출토되었으며, 석실분에서는 관정(棺釘)과 꺽쇠가 다량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제 흑갈유계수호는 4세기 후반의 이른 시기의 것으로 고분군 편년에 절대년대를 위한 기준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단봉문환두대도 등의 유물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주목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관은 인근의 화성리 백제토광묘, 청주 신봉동 백제석실분의 존재와 함께 4-5세기대 고분문화의 정립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북향사면에 유구가 밀집하고 있으며, 일정한 계획아래 유적의 무덤군이 조영되었다. 특히 유적내에 조성된 토광묘와 수혈식석실분이 비록 묘제는 달라도 유물의 부장방식이나 내용에서 서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천안용원리고분군은 유적의 잔존 현황과 유물 부장 내용에서 청주신봉동백제고분군과 함께 4-5세기 백제사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토광묘와 수혈식석실분의 공존과 부장유물의 유사성은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백제사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