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응암리취락유적에서는 원삼국·백제시대 주구 토광묘 15기, 주거지 16기, 구덩이 8기, 도랑유구와 조선시대 토광묘 22기, 주거지 1기가 확인되었다. 전체 유구는 배치상황으로 보아 크게 주거지와 도랑유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생활권역과 주구 토광묘로 이루어져 있는 분묘군으로 나눌 수 있으며, 별도의 권력으로 분리되어 있는 입지적 특징을 보여 당시 지역집단의 취락환경 및 공간구성의 양면을 파악하는데 매우 의미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주구토광묘는 모두 15기로, 토광묘군의 입지가 생활권역과 분묘와 관련된 매장권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주거지는 분묘유적과 상관성이 있는 생활유적으로 동일지역 내 3단계에 걸쳐 단계적으로 폐기와 사용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큰 시기차를 보이지 않는 주거지들이 반복적으로 점유된 원인은 질병, 분쟁, 자연수해, 생업경제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나, 제한적인 범위에 대한 현재의 조사상황만으로 취락의 전반적인 성격파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자연 폐기된 주거지와 화재로 폐기된 주거지가 서로 중첩되어 있는 가운데 이들의 배치 및 분포상태도 23기씩 무리를 이루며 군데군데 분포하는 점으로 보아 주거 구성원간의 충분한 인지속에서 연속적으로 재점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기응암리취락유적은 천안·아산·청주를 포함한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지역 일대에서 확인되는 34세기대의 생활유적으로 판단된다.
또한 생활유적군의 중앙에서 확인된 도랑유구도 주거지의 점유 당시 공존했던 시설물로서 구체적인 용도는 알 수 없다. 다만 다량의 토기편이 일시에 매몰된 형상으로 미루어 볼 때 자연폐기에 의한 자연현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일부 수변제사나 폐기의례와 같은 의례행위와의 연관성도 추정할 수 있으나 도랑유구 내의 유물출토 상태 등을 통해 자연화재에 의한 폐기라기보다는 질병이나 주변지역과의 분쟁 등 외부요인에 의한 인위적인 폐기일 가능성이 높다.
연기응암리취락유적은 청주·연기지역을 포함하는 미호천변의 원삼국·백제시대 기층문화의 변화상을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을 대비하여 고찰할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천안 청당동 유적을 비롯하여 오창 송대리 유적과의 비교 편년이 가능한 것으로 이들 두 유적을 연결하는 문화상을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