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서 2005년에 걸쳐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주관으로, 효창종합건설(주)이 시공한 서산 부장리 임대아파트 부지를 조성하기 위한 사전 문화재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유적이다. 2006년 11월 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31기와 수혈유구(竪穴遺構) 6기, 백제시대 주거지 40기와 분구묘(墳丘墓) 13기, 수혈유구 18기, 석곽묘(石槨墓) 3기, 그리고 조선시대 주거지 7기와 토광묘(土壙墓) 93기, 수혈유구 4기, 기타 시대 미상의 유구 45기 등 총 260여기가 복합된 생활 및 분묘 유적이다.
유적 전체 면적은 14,150㎡로, 그동안 서산지역에서 발굴 사례가 드물었던 청동기시대 전기 및 중기의 문화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로 판단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구는, 전기에 해당하는 흔암리(欣巖里) 유형의 세장방형(細長方形) 주거지와 방형 · 원형의 평면 형태를 가진 송국리(松菊里) 유형의 중기 주거지가 함께 입지하고 있다. 백제시대의 유구 중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방형과 장방형이며, 4주식의 주거지가 중심을 이루며 부뚜막시설이 일부 유구에서 확인되었다. 한편 백제시대의 유구인 분구묘와 주거지들이 공간 배치상 구분되어 나타나 당시의 묘장(墓葬) 풍습과 취락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백제시대 유구 중 분구묘는 조사지역의 서쪽에 밀집 분포하고 있어 그 동쪽 및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주거지와는 뚜렷한 공간 구분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시부터 생활유적과 분묘간의 뚜렷한 구분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분구묘 안에서 출토된 유물은 크게 토기류 · 철기류 · 장신구류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종류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토기는 직구단경호(直口短頸壺) · 광구장경호(廣口長頸壺) · 원저호(圓底壺) 등이 있으며, 일부 독특한 형태의 소형토기도 출토되었다. 철제 유물로는 환두대도(環頭大刀)를 비롯하여 초두(鐎斗) · 철부(鐵斧) · 철겸(鐵鎌) · 철도자(鐵刀子) · 철모(鐵鉾) 등이 확인되었다. 장신구류는 금동관과 금동식리(金銅飾履)를 비롯하여, 금제이식(金製耳飾), 각종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5호 분구묘에서는 금동관과 함께 철제 초두가 출토되었는데 목곽묘의 구조를 하고 있었다. 금동관과 철제초두 외에 곡옥(曲玉)과 구슬 · 금제이식 · 환두대도 등 다양한 토기가 출토되었다. 금동관은 용(龍)과 인동문(忍冬文)을 투조한 것으로, 앞면의 장식은 3개의 잎사귀 모양이고 뒷면의 장식은 방패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2003년도 공주 수촌리(水村里) 유적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형태나 규모면에서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금동관과 초두는 최고 지배자의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부장리 5호분이 이 지역 수장층의 무덤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유적의 분구묘는 이전 분구묘 조사에서 제시하지 못했던 분구묘의 축조과정과 확장과정, 그리고 분묘군의 형성과정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동안 문헌상의 기록에서 소홀히 다루어진 지방 세력에 대해 그 실체를 확인시켜준 것이 서산 부장리 분구묘이다. 또한 금동관이나 철제초두와 같은 최상급 위신재(威信財)를 사용한 지방 세력과 백제 중앙과의 정치적 관계 등 앞으로 백제사 연구에 과제와 논의를 남겨준 이 유적의 학술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