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록의 임야 및 경지 일대에는 20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는데, 이 중 2기만이 돌무지무덤〔積石塚〕이며 나머지는 봉토분(封土墳)이다. 만달산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조선총독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실시했는데 1916년에 돌무지무덤인 제1호분과 봉토분인 제2호분이 발굴조사되었고, 그밖에 파괴가 심한 돌무지무덤인 제3호분은 외부조사만 이루어졌다.
이어서 1926년에는 봉토분 14기가 발굴조사되고 1기는 외부만 조사되었다. 조사된 18기 중 대부분이 중·소형급에 해당하지만 동편에 위치한 제1·2·3호분은 상대적으로 크며 봉토는 방대형으로 추정된다.
조사 당시 돌무지무덤 2기는 매장주체부를 포함한 상부가 이미 유실되어 있었으나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파악되었다. 제1호분은 한 변 10.6m, 잔존 높이 1.15m이고, 제3호분은 한 변 17.2m, 잔존 높이 2m로 대동강유역 돌무지무덤의 규모는 큰 편에 속한다. 원형봉토분 16기의 매장주체부는 모두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며 홀방〔單室〕이 일반적이지만 3기(제5·7·8호분)는 각기 동서로 병행하는 같은 규모의 2실을 구비하였다.
무덤의 구조는 돌덧널〔石槨〕의 옆면이 긴 형식(橫壙式)으로 하나의 고분 중 덧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널방은 고구려의 고분에 흔히 있는 모줄임천장을 하고 있다. 돌덧널의 재료는 부근에서 풍부히 구할 수 있는 석회석을 사용하였고, 내면에는 회칠을 하였다.
외형은 거의 불명확하나 돌무지무덤은 네모모양의 기단을 가지며 봉토분 역시 방대형으로 봉토가 비교적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군에서는 돌무지무덤 1기와 봉토분 1기가 대표적이며 비교적 완전한 것이다.
제1호분은 석총(石塚)으로 만달산의 서남쪽 여호동의 산림 중 완만한 경사면에 조영되었던 것이나 이미 붕괴되어 당초의 형상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의 유허인 압록강 우안의 중국 봉천성(奉天省) 집안현(集安縣) 통구(通溝) 부근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그러한 종류의 돌무지무덤으로 초기의 형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붕괴된 석총도 당초에는 돌덧널을 만든 다음 흙을 덮어 작은 깬돌로 그 외부를 쌓고 다시 깬돌으로 사방을 계단형으로 쌓아올린 외형이 피라미드의 정상부를 자른 것과 같은 모양의 계단형절두방추형(階段形截頭方錐型)으로 볼 수 있다.
제2호분은 1호분의 남남동쪽 산림지대에 있는 고분으로 부근에 있는 것 중 최대이다. 봉토 및 돌덧널이 비교적 완정(完整)한데 내부는 석회석으로 남면해 옆면을 구덩이식으로 판 횡광식돌덧널〔橫壙式石槨〕을 쌓았다. 널방 천장은 고구려고분에서 통용되는 모줄임식으로 네 벽에서 각 창방(昌枋)을 쌓고 그 위에 우삼각(隅三角) 및 평삼각(平三角)의 모줄임을 거듭했다.
널방의 크기는 길이 약 270㎝, 너비 약 228㎝, 높이 3m이다. 널길은 길이 약 330㎝, 너비 90㎝, 높이는 널방에 접하는 부분이 138㎝, 입구가 180㎝이다. 널길 좌우의 측벽 및 천장은 그 입구까지 회칠을 하였다.
이 봉토분 역시 고구려시대의 봉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대형으로서 현재 봉토의 높이는 450㎝, 길이는 대략 15m 정도로 보인다. 돌덧널 내에서 발견된 쇠못은 전체길이 11.7㎝로 단면은 네모모양이고 머리부분은 원형으로 직경이 2.4㎝이다. 모두 널〔木棺〕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제3호분은 1호분의 남쪽, 2호분의 서남쪽 밭 가운데 있으며, 무덤의 주변은 흙으로 쌓았다. 길이 약 13.5m, 높이 약 150㎝의 네모무덤〔方形墳〕으로 역시 계단형절두방추형이다. 출토된 유물은 금제귀걸이·금동고리〔金銅環〕·청동팔찌〔靑銅釧〕·청동고리〔靑銅環〕·쇠거울〔鐵鏡〕·오수전(五銖錢) 등으로 고구려고분으로서는 매우 많은 편이다.
만달산고분군의 연대는 돌방의 구조 및 출토유물 등으로 미루어보아 대체로 5세기 후반대에서 6세기 전반대가 그 중심시기로 추정된다. 평양도읍기의 고분들 중에서 초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공품과 쇠거울 등은 고구려 고분문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