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연당리 고분군 ( )

고대사
유적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구덩식돌덧널무덤 ·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연당리고분군
정의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구덩식돌덧널무덤 ·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연당리고분군이 있는 영오면 일대는 사천시·진주시와 가깝고 남강(南江)유역권에서 고성분지에 들어가는 통로 중의 한 곳이다. 이 고분군은 남강의 작은 지류인 영천강 상류(영오천)의 작은 곡저평야를 끼고 있으며,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산지가 연접하여 이루어진 능선 허리부분에 형성되어 있다.

내용

이 고분군 중 4기의 고분(제14·18·20·23호분)이 1991년 12월 경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그 중 18호분과 20호분에는 각각 2개의 매장주체부가 배치되어 있어 조사된 유구는 굴식돌방〔橫穴式石室〕2기에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4기 등 모두 6기이다.

발굴조사된 고분은 모두 능선 정상부를 따라 배치된 봉분들이다. 봉분의 크기는 규모가 작은 14호분과 23호분이 직경 11m에 높이 3m가량 되고 규모가 큰 18호분과 20호분은 봉분의 직경이 12∼13m정도 된다.

이 고분군은 구릉의 정상부와 주변 사면을 따라 수십 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가야고분의 일반적인 특징과 부합된다. 고분군 중 제14호분과 제23호분은 단독의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인데, 길이에 비해 폭이 매우 좁은 세장방형(細長方形)이다.

제18호분과 제20호분은 양수식(兩袖式)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인데 한 봉분 내에 각각 소형의 구덩식돌덧널 1기가 딸려 있었다. 굴식돌방의 매장주체부는 평면 장방형(長方形)을 이루며 한쪽 단벽 중앙에 위치한 널길〔羨道〕은 1m정도로 짧은 편이다. 돌방의 전체 높이는 2m가량으로 바닥에서 1m까지는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차츰 안으로 좁혀진다. 입구는 얇은 판석으로 폐쇄하였다. 구덩식이나 굴식돌방 모두 벽은 얇은 판상(板狀)의 깬돌을 횡으로 쌓아 축조하였다. 장방형돌방에 짧은 중앙 널길은 백제계통으로 파악된다.

이와 같이 18호분이나 20호분은 구덩식과 굴식의 두가지 묘제가 공존하고 있으며 하나의 봉분 내에 두 묘제가 시차를 두면서 공존하고 있다. 즉, 매장주체인 굴식돌방이 먼저 축조되고 그 이후에 구덩식돌덧널이 18호분의 봉토를 일부 파내고 축조되면서 전체가 하나의 봉분으로 되어 있다.

서로 다른 묘제가 한 봉분 내에 축조된 것은 이들 상호간에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계가 굴식돌방의 한 유구 내에 추가장(追加葬)되는 경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한편, 제14호분을 제외한 3기의 고분은 봉분의 가장자리에서 폭 1m 내외의 도랑〔周溝〕시설이 확인되었다. 암반을 얕게 굴착해 만든 도랑은 배수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도랑 내에서 많은 토기들이 깨진 상태로 출토되고 있어 부차적인 의례공간으로도 이용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행위는 청동기시대 이래 계속되는 의례로서 인접한 고성 율대리 2호분을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나타나고 있다. 18호분에서는 매장주체부에 외래계 토기가 부장되고 있는데 반해 도랑에서는 모두 재지계 토기만이 의례에 이용되고 있다.

이 고분들은 모두 도굴되어 부장된 유물이 완전하게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엽환두대도(二葉環頭大刀)를 비롯해 화살촉, 낫, 끌, 쇠방울〔鐵鐸〕, 살포, 재갈, 덩이쇠〔鐵鋌〕등의 철기류와 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長頸壺〕, 굽다리항아리〔有臺壺〕, 손잡이잔〔把杯〕,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원통모양그릇받침〔圓筒形器臺〕등 다수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연당리고분군 중에는 백제계통의 고분(18호분)도 존재하는데, 이는 백제에서 고성지역으로의 굴식돌방이 확산되는 계기와 경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편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는 고성을 비롯해 사천·진주·하동·산청 등지에 주로 분포하는 이른바 ‘소가야양식(小加耶樣式)’이 주된 계통이다. 그러나 긴목항아리처럼 외래계인 고령계나 짧은 굽다리접시와 굽다리항아리처럼 일부 신라계 토기도 출토되고 있다. 주변 지역의 토기나 묘제를 참고로 할 때, 연당리고분군의 축조시기는 대체로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연대추정은 6세기초부터 서남해안지역으로 확산되는 고령계양식 토기로부터부터 시작하여 여러 지역의 토기 양식이 유입되어 혼합된 토기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데서 가능하다.

주변에는 삼국시대 유적도 다수 확인되고 있는데, 영천강 상류의 영현면 성산리고분군, 영오천 유역의 영오면 오동리고분군, 영대리고분군, 성곡리고분군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연당리고분군은 고분의 수나 봉분의 규모로 볼 때 영오천 일대의 중심고분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성읍내의 소가야 중심 고분으로 생각되고 있는 유적에 대한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소가야의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도 드문 실정이어서 연당리고분군의 역사적 성격을 조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고성연당리고분군」(박순발·이상길, 경남대학교박물관, 1994)
「소가야권 유적 지표조사 약보-고성군 일대의 청동기 시대-가야시대 유적을 중심으로-」(조인성·박순발,『가라문화』10, 경남대 가라문화연구소, 1993)
집필자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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