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지방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으로 나타나며, 가야시대에는 6가야의 하나인 소가야(小加耶)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율대리고분군은 고성읍으로부터 마산∼충무간 국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불과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일대에는 서쪽의 남산과 연결되는 저구릉이 형성되어 있고, 여기에 모두 4기의 봉토분(封土墳)이 축조되어 있었다.
이 중 제1호분은 1972년 한국전력주식회사 고성출장소 건설 때 파괴돼 없어졌다. 제2호분은 마산∼충무간 국도의 확장 및 포장공사에 따라 1989년 4월 10일∼5월 21일까지 국립진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는데, 직경 20m, 높이 3m 정도의 원형봉토분이었다.
율대리고분군은 하나의 봉토 내에 5기의 돌덧널〔石槨〕이 마련된 여러덧널식봉토분〔多槨式封土墳〕으로, 평면형태는 원형에 가까우며 그 가장자리에는 봉토를 일주하는 도랑〔周溝〕이 설치되어 있다. 제1호분은 돌덧널이 중심 돌덧널이다. 제2∼5호분도 단순히 제1호분에 종속된 무덤이 아니라 제1호분의 주인공과 거의 대등한 부류의 것으로, 이들 돌덧널은 추가장(追加葬)으로 파악되었다.
조사과정을 통해 봉토의 축조과정을 대체로 3단계로 요약해 복원할 수 있다.
첫째, 고분이 위치할 자리를 정지(整地)한 뒤 깨끗한 흑색점토를 20∼30㎝ 두께로 깐다. 둘째, 본격적인 성토단계로서 먼저 봉토의 가장자리를 평면상 5등분하여 각각 일정한 높이까지 쌓고, 중앙부에는 점성이 아주 강한 흑색점토를 다져 채워 봉토의 대체적인 모양을 갖춘다.
셋째, 봉토의 중심부를 파서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을 축조하고 봉토를 덮어 마무리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돌덧널 자체가 성토된 봉토 위에 축조된 관계로 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측벽 하단을 바닥보다 더 내리고, 그 사이에 보강석을 끼우는 방법을 취하였다.
유물은 파괴가 매우 심하여 원래의 껴묻거리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 여러 점의 토기류와 쇠투겁창〔鐵矛〕, 쇠낫 등의 철기류 및 철제 발걸이〔鐙子〕, 재갈 등 마구류도 출토되었다.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는 형태상으로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2호분 덧널의 굽다리목항아리·손잡이바리·그릇받침 등이 있는데, 고령·합천 등지에서 많이 출토되는 대가야계 토기로 분류된다. 다음으로는 1호분 돌덧널의 바리, 2호분의 굽다리접시와 3호분의 굽다리목항아리의 한 무리가 있는데, 이것들은 신라토기로 분류된다. 그 밖의 토기들로는 봉토 안에서 출토된 목항아리, 2호분의 그릇받침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고성 지역 고유의 것으로 분류된다.
율대리고분군의 축조연대는 출토된 대가야계 토기와 신라토기의 연대를 근거로 하여 대략 6세기 중엽경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고성에는 대가야 및 신라가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소가야는 점차 쇠퇴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