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왕릉은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일대 면적은 1만 5,385㎡이다. 형제산의 남쪽 산기슭에 자리하며 이 왕릉 동쪽에는 제33대 성덕왕릉이 있다. 1730년(영조 6)에 김씨 일족에 의해 성덕왕릉의 형제 능이라는 이유로 효소왕릉을 이곳으로 비정한 이래 따르고 있다.
효소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理供)으로, 제31대 신문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692년에 즉위하여 702년에 승하할 때까지 10년간 재위하면서 모든 제도를 정비하고 당나라·일본 등과 수교하였다. 왕이 승하한 뒤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왕릉의 크기는 지름 10.3m, 높이 4.3m, 둘레 57.5m이다.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며 묘제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밑둘레에는 40∼50㎝의 자연석을 사용하여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둘레돌을 1m정도 쌓아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둘레돌이 대부분 묻혀 있다.
현재의 왕릉은 1929년 4월, 1969년 11월에 도굴을 당했다. 특히 두 번째 도굴로 돌방의 규모가 드러났는데, 길이 3m 너비 150㎝ 높이 150㎝의 크기였다. 돌방에 사용된 돌은 화강석이었으며, 돌방 안에 부장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의 효소왕릉에 대해서는 이견이 제기되어 있다. 무덤 앞에 있는 혼유석(魂遊石)이 빈약하고 무덤의 규모도 작아 통일신라기의 왕릉으로는 생각할 수 없어 효소왕릉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효소왕릉은 현재의 망덕사터의 남남동 방향 약 8㎞ 거리에 해당하므로 망덕사 바로 동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망덕사터에서 동으로 200m 미만의 가까운 거리에 인접해 있는 사적으로 지정된 신문왕릉이 효소왕릉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신문왕릉은 경주 남산에 있는 황복사지 3층석탑(皇福寺址三層石塔)에서 동편으로 약 250m 거리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능의 위치로나 둘레돌의 축조상태로 보아서 부합된다는 것이다. 특히 둘레돌은 자연석을 다듬은 소형 석재로 바뀌고 갑석(甲石)과 지대석이 처음으로 갖추어지고 기단식으로의 이행단계에 있으며 삼각형에 가까운 구형(矩形)의 버팀석이 처음으로 출현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