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동리 고구려 고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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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춘천 방동리 고구려 고분 1호분
춘천 방동리 고구려 고분 1호분
고대사
유적
국가유산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석실분.
이칭
이칭
춘성방동리고분, 방동리고분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방동리고구려고분(芳洞里高句麗古墳)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지정기관
강원특별자치도
종목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1985년 09월 13일 지정)
소재지
강원 춘천시 서면 방동리 816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석실분.
개설

일명 ‘춘성 방동리고분’이라고도 한다. 유적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묘에서 서쪽으로 100m 떨어져 있으며, 여기서 동남쪽으로 춘천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2기의 고분은 1981년에 김원룡(金元龍)교수가 발견했고, 1993년에 한림대학교박물관이 발굴하였다. 발견 당시 이미 2기 모두 돌방의 바닥까지 도굴당해 천장부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고분의 앞에는 천장을 덮었던 대형의 괴석들이 흩어져 있었다.

내용

발굴 결과, 2기 모두 동측에 무덤길〔墓道〕이 붙은 외방무덤〔單室墓〕으로 밝혀졌다. 외부의 봉토는 거의 유실되었다. 천장은 3∼4단의 벽을 쌓아 올리면서 모서리를 죽이고 하나의 큰 판돌을 올려 마무리한 모줄임식〔抹角藻井式〕을 채용하였다. 두 고분은 서로 동일 능선상에서 약 19m 떨어져 있고, 서측의 무덤이 제1호, 동측의 큰 것이 제2호로 명명되었다.

제1호분은 발견 당시 모줄임식 천장부의 북쪽 판석 2매가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돌방의 크기는 천장부 판석에서 바닥까지가 120㎝, 돌방 바닥이 동서 125㎝, 남북 175㎝이다. 널길〔羨道〕은 길이가 175㎝, 폭이 60㎝이고, 널길부의 석축 높이는 70∼80㎝이다. 널길 부위에 덮개돌이 1개가 남아 있고, 널길 남단 앞에는 널길과 돌방 천장을 덮었던 대형 판석들이 널려 있었다. 시신을 놓기 위한 주검받침돌〔屍床石〕로 보이는 소형의 납작한 판석이 돌방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주검받침의 규모와 크기를 알 수는 없었다.

제2호분은 제1호분과는 달리, 돌방과 널길을 가운데 두고 정사각형으로 돌을 둘러쌓아 봉토의 역할을 보강한 독특한 구조이다. 잔존하는 천장돌 2매의 바닥면에서 돌방의 바닥까지의 깊이가 134㎝이고, 돌방 바닥은 동서 130㎝, 남북 210㎝이다. 동편 널길은 길이가 230㎝이고, 평균 폭이 60㎝, 널길부 양측 석축의 높이가 110∼130㎝이다.

주검받침은 돌방 바닥의 서편에 작고 납작한 깬돌을 깔아서 약 120㎝의 폭으로 하였고, 주검받침 바깥 부위는 특별한 바닥처리를 하지 않았다. 주검받침의 규모로 보아 2인을 안치할 수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널길을 막는 돌은 길이가 128㎝, 폭이 65㎝의 판석이다. 그 바깥쪽을 커다란 괴석으로 채워서 봉쇄하였다.

제1·2호분이 모줄임식 천장구조를 하고 있는 점과, 흑색 · 회색의 연질토기편이 제2호분의 돌방 바닥, 제1·2호분의 사이, 그리고 제1호분 앞에서 발견되어 두 무덤을 고구려계 돌방무덤으로 보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방동리 고구려고분의 돌방무덤은 남한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통구(通溝)나 평양 지역의 고구려 돌방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다. 이른바 봉토돌방무덤의 전통이 북방 고구려에서 춘천 지역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의 후기 양식이 지방화한 형태이다.

제1·2호분의 상관관계는 봉토의 층위로 볼 때, 제1호분보다 제2호분이 먼저 시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본 형식이 동일한데도 제2호분이 제1호분보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제1호분의 주인공이 제2호분의 주인공보다 권력이 뒤떨어지거나, 일족 가운데 제2호분이 주인공의 무덤이라면, 제1호분은 후에 사망한 가족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주변의 고구려계 유적으로는 춘천시 중도(中島) 소재 돌무지무덤 2기와 경기도 양평군 문호리 소재 돌무지무덤 1기를 들 수 있으나, 이것들은 분묘의 계통이 다르다. 경기도 가평군 이곡리에도 방동리 고분과 같은 모줄임천장식 돌방무덤이 존재한다.

방동리 고분의 형태를 통해본 연대는 대체로 6세기 중엽을 상한으로 하고 있으며, 모줄임의 고구려식 돌방무덤의 남한지역 분포가 확인된 최초의 예이다.

신라가 죽령을 넘어서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엽 이전에 가평 · 춘천지방은 고구려영역이었으므로 그곳에 고구려식 고분이 분포하는 것은 당연하다. 6세기 중엽 이후 춘천 지역이 신라영역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묘제가 갑자기 신라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 지역의 세력가들은 여전히 고구려식 분묘를 사용했을 개연성이 크다.

참고문헌

『한국의 고분』(김원룡,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춘성군방동리의 고구려식석실분이기」(김원룡,『고고미술』149,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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