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3월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에 의해 보령리고분군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1984년 7월에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옛 보령현의 진산이던 진당산(鎭堂山)의 남쪽 기슭으로 앞쪽에 작은 냇물이 흐르고 산맥으로 가로막힌 골짜기에 약 60여 개의 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고분군 중에서 총 12개의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7기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고 5기는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이었다. 조사된 무덤들은 이미 이전부터 심하게 도굴당한 상태여서 쉽게 확인되었다.
보령리고분군은 유형상 대략 3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첫째는 돌방〔石室〕의 천장을 궁륭(穹窿)모양으로 올려서 좁힌 다음 한 두 개의 판상할석(板狀割石)으로 덮은 것으로 제5호분이 이러한 형태이다. 둘째는 장방형 돌방 평면에 벽을 약간 안쪽으로 좁혀 쌓은 뒤 4∼5매의 판상석(板狀石)을 옆으로 걸쳐놓은 것들로 제1·2·3·6·7·11호분들이다. 이 중 제11호분은 제5호분처럼 무덤 안팎으로 통하는 배수구를 갖추었다. 첫째와 둘째는 굴식돌방무덤으로서 첫째 유형은 백제 웅진시대, 둘째 유형은 사비시대의 특징을 보인다. 셋째는 앞트기식돌덧널무덤으로서 작은 돌덧널〔石槨〕을 만들었으며 퇴화되고 작아진 것들인데, 사비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은 모두가 문처럼 남벽에 문방(門枋)을 만들었으며, 그 앞에 팔(八)자 모양으로 무덤길을 석축(石築)한 특이한 형식으로서 웅진시대에서 사비시대로 이행되는 6세기경의 것들로 추정된다.
무덤구덩이〔墓壙〕는 완전지하식 내지 반지하식이다. 유물로는 병모양토기〔甁形土器〕와 뚜껑접시가 출토되었다. 돌로 덮은 천장의 바깥면에는 석회로 틈없이 메웠던 흔적도 있다.
바닥은 3가지 종류가 확인되어 생토인 것, 생토 위에 잔자갈을 다진 것, 제3·7호와 같이 얇은 판석을 깐 것 등이 있다. 무덤 크기는 산비탈의 위쪽에 있는 것은 규모가 크고, 아래쪽에 있는 것은 작다.
보령리고분군은 모두 남향한 산복(山腹)에 위치하고 있어서 공주·부여지역의 고분입지와 거의 유사하다. 이 고분군에서는 돌방 안에서 사람뼈가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머리 방향은 북침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사된 12기의 고분들에 있어서 공통적인 특징은 널방 입구의 형식과 그 폐쇄방법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남벽이 모두 문틀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 고분군에서는 배수구를 갖추고 있는 무덤들이 있었는데 널방의 내외를 연결하는 완전한 배수구를 가지고 있는 것은 2기뿐이었다. 이들은 널방 내의 중앙을 북에서 남으로 오목하게 파고 그 안에 작은 자갈을 채워 넣는 형식이었다. 나머지는 퇴화형 배수구를 지니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보령리고분군은 백제시대 새로운 마을을 형성한 지배층의 무덤들로 생각되며, 서쪽으로 약 2㎞쯤에 있는 갈현리고분군과 함께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이다. 이 고분군을 통해 완전한 배수구에서 퇴화형의 배수구로 이행해 가는 모습을 전반적으로 살필 수 있고, 5기의 앞트기식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된 병모양토기와 뚜껑접시는 전형적인 사비시대의 유물이다. 이를 통해 이 고분군이 웅진시대에서 사비시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제고분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