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대성동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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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김해 대성동 고분군 전경
김해 대성동 고분군 전경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널무덤 · 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이칭
이칭
대성동 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91년 01월 09일 지정)
소재지
경남 김해시 대성동 434번지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널무덤 · 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개설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대성동 고분군은 경상남도 김해시 중심부에 있는 수장층의 무덤떼로서 구지봉(龜旨峯)과 회현리 조개더미의 중간지점, 수로왕릉(首露王陵)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해발 22.6m의 북에서 남으로 L자형으로 길게 휘어진 낮은 구릉에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2세기경부터 6세기경까지 장기간에 걸쳐 무덤지역으로 사용되었는데 거대한 무덤은 전망이 좋은 구릉의 정상부에 아래에서 위로 열을 지어 조영되었다. 그러나 작은 무덤은 구릉의 사면에 무질서하게 만들어졌다. 이 고분군은 경성대학교박물관에 의해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된 바 있다.

내용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구릉의 낮은 저지대로부터 널무덤[木棺墓]이 축조되기 시작하고 점차 구릉 위로 가까워지면서 덧널무덤[木槨墓]으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대규모의 주부곽식덧널무덤[主副槨式木槨墓]이 축조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널무덤은 이른 시기의 무덤으로 주로 구릉의 끝이나 평지에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널은 판재를 이용해 짰다. 그러나 통나무널도 확인돼 창원 다호리의 통나무널과 비교된다. 덧널무덤은 널무덤을 파괴하고 축조되어 주로 구릉의 정상부에 분포한다. 2종류의 무덤이 시기를 달리해 축조되어 있다.

Ⅰ류 덧널무덤은 널구덩의 깊이가 150㎝ 전후로 얕으며 길이와 폭의 차이가 별로 없는 네모모양[方形]이다. 주검받침에 별다른 시설을 하지 않았다. 3세기 후반으로 비정되는 제29호분을 비롯해 널구덩이 차츰 깊어지는 제2·13·18·23호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5세기 전후에 등장하는 Ⅱ류 덧널무덤은 널구덩의 깊이가 3∼4m로 갑자기 깊어지고 주검받침[屍臺]에 자갈을 깔기도 하였다. 으뜸덧널[主槨]에는 네 모서리에 반듯이 통나무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통나무를 대어 널을 만들었다. 이와 나란히 딸린덧널[副槨]을 만들었다. 이 시기 무덤은 다량의 무기류의 보유, 3∼6인의 순장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제1·7·8·11호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Ⅱ류 덧널무덤은 Ⅰ류 덧널무덤을 파괴하면서 중복돼 축조되고 있다. 주로 4∼5세기 전반에 이 지역의 전성기에 축조된 것이나, 이후 작은 덧널무덤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되고, 이어 돌덧널무덤이 축조되고 있다.

여러 종류의 무덤에서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토기로는 삿자리무늬와 문살무늬가 두드러져 있는 와질(瓦質)·경질(硬質)의 항아리와 굽구멍이 없는 굽다리접시·화로모양토기·큰입항아리 등 4세기대의 토기, 2단굽구멍의 굽다리접시·굽다리항아리·사발·바리모양그릇받침·원통형그릇받침 등의 5세기대의 토기가 대부분이다.

이밖에도 6세기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짧은 굽다리의 굽다리접시와 굽다리긴목항아리 등이 있다. 또한 철제품과 외래 유물들도 주목된다. 철소재로서 화폐의 기능을 담당한 납작도끼[板狀鐵斧]나 덩이쇠[鐵鋌]는 가야의 철생산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른 시기에 만든 대형 덧널무덤인 제29호분에서는 납작도끼, 이후 시기의 제2·23호분에서는 덩이쇠가 발견되어 전자에서 후자로의 전환을 알려 준다. 이러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많은 무기와 무구가 제작될 수 있었다.

북방계 유물로는 제29호분과 제47호분에서 출토된 청동솥[銅鍑], 제11호분의 호랑이모양 띠고리 등이 있다. 통나무를 쌓아 만든 덧널무덤도 북방적인 요소로 여겨진다. 또한 방격규구신경(方格規矩神鏡)이라는 중국제 거울이 3점 출토되었다.

제14호분에서 나온 부러진 거울은 면을 갈고 한쪽에 끈을 꿰게 구멍을 만들어 목걸이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당시 거울이 얼마나 소중하였는가를 알려 준다. 일본계 유물로는 파형동기(巴形銅器), 조개팔찌 등이 있다. 이는 일본에서도 보물로 여겨지던 소중한 유물로 일본이 가야의 철을 수입하면서 교역한 물건으로 여겨진다.

이 유적에는 구릉을 두르는 크고 넓은 도랑[環濠]이 발견되어 무덤과 함께 사람이 살았던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3세기 이전에는 구릉의 바깥을 도랑으로 두르고 내부에는 마을이 들어서고 외부에는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덧널무덤이 만들어지면서 구릉 전체가 무덤구역으로 변해 마을은 남으로 600∼700m 정도 떨어진 봉황대로 옮겨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3∼6세기에 해당하는 유구와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4∼5세기에 번영한 금관가야(金官加耶)의 옛 터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때문에 구야국(狗倻國) 또는 금관가야의 국가적인 성장 과정이나 그 특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청동솥과 같은 북방계 유물이나 방격규구신경과 같은 중국제 위세품은 한군현(漢郡縣) 지역과의 교역이 활발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고분군에서는 덧널무덤의 규모가 대형화되고 철제무기류, 갑옷류, 마구류들이 다량으로 매납되는 현상이 나타나며 특히 외국으로부터 이입된 의기적(儀器的)인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는 낙랑군(樂浪郡) 소멸 이후 김해지역이 북방민족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현재까지 왜계(倭系) 유물로 알려진 파형동기는 당시 금관가야와 왜지역과의 정치·경제적인 상호작용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은 유물이다.

그런데 대성동 고분군을 마지막으로 김해지역에는 큰 무덤이나 유적은 조영되지 않았다. 대신 큰 무덤은 강 건너인 부산 복천동이나 연산동에 만들어졌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김해의 고분문화』(김해시, 1998)
『국립중앙박물관도록』(국립중앙박물관, 1996)
「김해대성동고분군Ⅰ」(경성대학교박물관, 2000)
「김해대성동고분군Ⅱ」(신경철·김재우, 경성대학교박물관, 2000)
「김해대성동고분군주변지역시굴조사」(김해시·경성대학교박물관, 2000)
「김해구지로분묘군」(경성대학교박물관, 2000)
「김해대성동 제13호분 발굴조사의 성과」(경성대학교박물관, 1991)
「가야문화권유적정밀조사보고서: 김해시·김해군」(부산대학교박물관, 1984)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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