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동고분군은 1990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군은 김해시의 중심부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4㎞ 정도 떨어져 있다. 고분들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뻗은 칠산(七山)의 명법(明法) 1구 구릉 뒤쪽 해발 100m 전후의 산정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종래에는 ‘김해명법동고분군’이라고도 불렸다. 김해시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군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또한 가장 규모가 큰 고분군 중의 하나이다.
이 고분군은 일제강점기부터 대부분 도굴과 파괴를 당해왔으나 1987년과 1988년의 2차에 걸쳐 경성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유적 전체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산 정상으로부터 일정한 간격과 범위를 두고 4지구로 나누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덧널무덤〔木槨墓〕·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널무덤〔木棺墓〕·독무덤〔甕棺墓〕·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등 119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구릉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Ⅰ지구에서는 덧널무덤 23기,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3기, 움무덤〔土壙墓〕2기, 독무덤 2기 등 30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무덤의 장축방향은 모두 남북방향이고 많은 무덤들이 중복 설치되어 있었다. 주류를 이루는 덧널무덤은 대부분 장방형의 외덧널식〔單槨式〕이나 1·2·27호분은 으뜸덧널〔主槨〕남쪽에 방형의 딸린덧널〔副槨〕을 따로 파서 설치한 이혈묘광(異穴墓壙)으로 ‘창(昌)’자형의 주부곽식(主副槨式)이었다. 덧널의 내부에서는 각종의 와질토기와 도질토기를 비롯하여 소형의 덩이쇠〔鐵鋌〕, 도끼, 투겁창 등 각종 철기류와 수정 및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덧널무덤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말 무렵까지 계속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고분군의 가장 높은 능선의 상부에 위치한 Ⅱ지구에서는 구덩식돌덧널무덤 4기, 앞트기식돌방무덤 1기, 독무덤 1기 등이 조사되었다. 돌덧널무덤은 다듬은 깬돌을 쌓아 축조한 것으로 평면형태가 긴 장방형이다. 이곳의 무덤들은 5세기말이나 6세기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정의 바로 아래 비교적 평탄한 곳인 Ⅲ지구에서는 덧널무덤 12기, 구덩식돌덧널무덤 15기, 앞트기식돌덧널무덤 2기, 독무덤 5기, 움무덤 3기 등 모두 38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무덤들의 장축방향은 모두 동서방항이고 피장자의 머리 방향은 동쪽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무덤 축조시기는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 사이로 추정된다.
한편 Ⅰ지구의 서남쪽 완만한 사면인 Ⅳ지구에서는 구덩식돌덧널무덤 8기, 독무덤 5기, 덧널무덤 31기, 근대의 민묘 1기 등 모두 45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Ⅰ지구와 같이 덧널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무덤구덩이가 얕고 긴 특징이 있다. 덧널과 무덤구덩이의 사이에 깬돌을 채워 덧널을 고정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의 범주에 들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소형으로 출토유물도 빈약하였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이곳의 무덤들은 5세기 후반과 6세기초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칠산동고분군의 무덤들은 좁은 범위에 서로 중복 조성되어 있어 묘제의 변화과정 및 유물의 편년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조사된 덧널무덤의 중심연대는 4세기대로, 금관가야 전성기의 묘제는 덧널무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최고식(最古式)의 구덩식돌방무덤도 다수 발굴조사되어 구덩식돌방무덤의 출현시기·원류·계보 등의 구명에도 중요한 단서가 제공되었다.
한편, 5세기 후반에서 6세기대에 걸쳐 세장방형(細長方形)의 무덤구덩이를 가진 소형 널무덤이 김해의 일부지역에서 피지배자의 무덤으로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도 새롭게 밝혀졌다.
이 고분군은 금관가야 내의 유력집단의 집단무덤으로, 4∼7세기대의 낙동강 하류지역의 묘제의 변천, 토기문화의 발달 등을 체계적으로 구명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와 정치구조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최적의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고분군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순차적으로 묘역이 확대되었고 후대에는 다시 아래 지역이 묘역으로 재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도굴의 피해를 입어 유물의 조합상을 살필 수는 없으나 Ⅲ지구 35호분에서 갑옷 1식이 출토되어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이 고분군을 조영한 집단이 4세기대에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중심으로 하여 금관가야의 지역 지배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무덤의 규모가 작아지고 출토유물도 빈약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시기가 내려오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어 일반취락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