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崔瑩, 13161388)은 홍건적과 공민왕 우왕 대 극심하였던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고 여러 차례 내란을 진압하는 데 큰 전공을 세웠다. 뛰어난 무공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고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지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앙 정계의 핵심에 있었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실각하고 고봉(高峰)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형된 뒤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의 무덤 앞에 묻혔다.
그의 나이 16세에 아버지가 임종 무렵 남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견금여석(見金如石)〕.”라는 유훈을 간직하고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최영의 무덤은 오랫동안 풀이 돋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렸다. 최영은 사형에 임하여 “내가 평생 탐욕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무덤 위에 풀이 나지 않았고, 1970년대 묘역을 정비한 후 봉분에 풀이 자랐다고 한다.
최영장군묘는 고양시 대자산(해발 200m) 남서 사면 중턱에 있다.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는 완만한 구릉 경사면에 2단의 축대를 설치해 평탄지를 조성하고 그 위에 동-서로 석축을 쌓아 2단의 묘역을 조성하였다. 묘역 최상단에 2개의 봉분이 앞뒤로 자리하는데, 앞쪽이 최영장군묘이며 뒤쪽이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의 무덤이다.
봉분이 자리한 구역은 3단의 계체석(階砌石)이 설치되어 4단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2단에 최영장군묘가 있다. 최영장군묘는 문화유씨(文化柳氏)와 합장(合葬)한 단분(單墳)이다. 봉분은 평면 장방형으로 아래쪽을 다듬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둘렀다. 전면과 측면은 호석이 2단이나 경사가 높은 후면은 1단으로 마감하였다. 봉분 정면 왼쪽에는 묘비가, 오른쪽에는 무민공충혼비(武愍公忠魂碑)가 세워져 있다.
봉분 앞에는 문인석과 망주석 각 2기와 상석과 향로석, 혼유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덤 주위에는 곡장(曲墻)이 ‘∩’형으로 둘러쳐져 있다. 최원직묘는 최영장군묘와 같은 방형분(方形墳)이며, 봉분 전면 왼쪽에 묘표가 세워져 있다.
묘역에 설치된 석물과 충혼비는 1970년대 묘역을 정비하면서 추가된 것이다. 그러나 봉분은 고려~조선 전기 지배 계층의 무덤으로 사용된 전형적인 방형분의 형태이고, 묘역에 여러 단의 계체석이 설치되어 있는 등 옛 묘제의 모습이 남아 있다.
최영장군묘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대자산의 남서쪽 기슭에 자리한다. 1970년대 묘역 정비를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고, 1975년 9월 5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최영의 묘비에는 “고려진충분의좌명안사공신(高麗盡忠奮義佐命安社功臣) 판밀직사대장군(判密直事大將軍) 문하시중찬성(門下侍中贊成) 사육도도순찰사(事六道都巡察使) 철원부원군 익 무민 동주 최공휘영지묘 삼한국대부인문화유씨 부좌(鐵原府院君 益 武愍 東州 崔公諱瑩之墓 三韓國大夫人文化柳氏 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1386년(홍무 18) 최영이 세운 최원직의 묘비에는 전면에 “증 순충 아양 염검 보세 익찬공신 벽산삼한삼중대광(贈 純忠 雅亮 廉儉 輔世 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판문하부사 상호군 겸 판예문춘추관사 동원부원군 최공묘(判門下府事 上護軍 兼 判藝文春秋館事 東原府院君 崔公墓)”라고 새겨져 있다.
최영장군묘는 고려시대 방형분의 특징이 남아 있다.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고 청렴과 강직함으로 지금까지도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최영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