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은 선조 연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진은 처음 강화에 경기 수영(京畿水營) 소속 수군진(水軍鎭)으로 세워졌다가 1666년(현종 7) 통진으로 수군첨사(水軍僉使)진을 이전해 설치하였다. 그 후 강화에는 별장(別將)을 두었다. 1677년(숙종 3) 강화에 있는 진의 명칭을 ‘덕진’으로 바꾸고 진장을 병마만호(兵馬萬戶)로 승격하였다. 1682년(숙종 8)에는 덕포진을 주진(主鎭)으로 승격하고 영종과 안흥진을 관장하게 하였다. 덕포진에는 수군 300여 명과 방선(防船) 2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3척을 배치하였다. 덕포진 본진에는 객사와 내 · 외 진사(鎭舍), 삼문(三門)과 행랑(行廊), 어변정(禦變亭), 어변청(禦變廳)이 있었고 포대(砲臺) 부근에 군기고(軍器庫)와 파수청(把守廳)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덕포진은 주문진, 장봉진, 영종진, 덕적진 등 경기 수영 소속의 수군진과 더불어 바다에서 강화도와 도성으로 진입하는 외적을 통제하기 위한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덕포진은 19세기 말 서양 세력의 침입을 저지하는 군사 기지의 역할을 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덕포진은 강화해협 대안(對岸)의 광성보(廣城堡), 덕진진과 함께 미군 함대에 사격을 실시해 염하(鹽河)를 통한 미군의 북상을 저지하였다. 이후 덕포진에 15개 포좌를 갖춘 포대를 설치해 강화의 포대와 대응하여 염하 수로를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1895년(고종 32)에 폐지되었다.
덕포진은 1980년 발굴 조사(發掘調査) 이후 유적으로서 가치를 평가받아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92호로 지정되었다. 1981~1982년 덕포진의 포대와 토성을 보수하고 돈대지(墩臺地)와 파수청지를 정비하였다. 2011년 덕포진에서 김포 덕포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80년 발굴 조사에서 돈대(墩臺), 파수청, 포대 등의 시설물이 확인되었다. 이 중 돈대는 2017년에 재발굴하였다. 덕포진의 돈대에서는 하부 기초 시설과 수구 2기를 확인하였다. 구릉(丘陵)을 따라 돈대가 들어서서 덕포진 돈대의 평면 형태는 동서 방향으로 길고 남북 방향의 폭이 좁다. 돈대의 기초 시설 규모는 북쪽 36.2m, 남쪽 48.2m 정도가 확인되었으며, 남북의 너비는 10~11m 가량이다. 돈대의 기초는 하부에 지대석을 놓고 안쪽에 강회(剛灰)와 사질 점토(沙質粘土) 등을 섞어 판축(板築) 형식으로 축조하는 ‘강회판축적심’ 방식을 사용하였다. 덕포진 돈대의 평면 형태나 축조 방식은 일반적인 강화도 돈대의 평면 형태나 축조 방식과는 차이가 크다. 덕포진에 돈대를 축조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강화도 돈대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수청은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하는 장소이자 포병을 지휘하는 장대이다. 파수청을 발굴한 결과 그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인 것으로 추정된다. 파수청은 바깥으로 석담을 두르고, 내부에는 화덕이 있었다. 포대는 화강암 석재로 장방형(長方形)의 개별 포좌(砲座)를 구축한 뒤 포좌 상면과 좌우를 흙으로 덮어 기다란 토성 형태로 만들었다. 화포가 배치되는 포좌 안쪽 바닥에는 판석을 설치하였다. 포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소포(小包)와 중포(中包) 6문을 비롯해 탄환, 포가(砲架) 등이 출토되었다. 이때 수습된 화포에는 “동치십삼년오월(同治十三年五月)”이라는 명문(明文)이 새겨져 있어 1874년(고종 11)에 화포를 주조하여 덕포진에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포대의 북동쪽에 덕포진의 본진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였으나 해당 지역에 대한 시 · 발굴조사에서 관련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밖에 포사청, 군기고, 우물 등 덕포진 내 주요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해 여러 차례의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시설물과 관련된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덕포진은 김포 해안선이 손돌목에 이르러 서쪽으로 돌출하는 구릉 지대에 있다. 이곳은 도성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의 길목이다. 약 1km 폭의 바다 건너에 광성보와 덕진진이 있다.
덕포진 경내의 북쪽에서부터 돈대 터와 파수청 터, 포대가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돈대는 경내의 최북단에서 염하 방면으로 좁고 길게 뻗은 지형 위에 있는데 현재 지표상에서는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현재 파수청지는 발굴을 통해 확인된 건물의 기초부가 일부 노출되어 있다. 포대는 염하와 나란히 남북 방향으로 이어져 있으며 ‘가’, ‘나’, ‘다’ 3개의 포대로 구성되었다. 포좌는 15개가 구축되어 있으며 가장 남쪽의 ‘가’ 포대에는 7개, ‘나’ 포대에는 5개, 북쪽의 ‘다’ 포대에는 3개의 포좌가 설치되었다. 초가와 기와로 포좌의 지붕을 복원하였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덕포진의 면적은 약 48,794㎡이나 이는 본진을 제외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 덕포진의 규모는 이보다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포진 본진의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김포 덕포진은 전란 때 보장처(保障處)였던 강화도와 17~18세기 도성의 방어 체제 구축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이다. 도성으로 연결되는 바닷길의 주요 길목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김포 덕포진은 신미양요 당시 손돌목에서 강화 광성보, 덕진진과 함께 미군 함대의 북상을 저지한 역사의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