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읍성 ()

건축
유적
문화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에 있는 조선 후기 읍성(邑城)이자 수영성(水營城).
유적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둘레
430m
면적
5,958.7㎡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번지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인천광역시
종목
인천광역시 시도기념물(1995년 3월 2일 지정)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번지
내용 요약

교동읍성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에 있는 조선 후기 읍성이자 수영성(水營城)이다. 1629년(인조 7)에 경기 수영이 남양에서 교동으로 이설되면서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영성과 일반 읍성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성으로 조선 후기 강화와 교동의 역사적 전개 양상 및 도성 방어 체계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에 있는 조선 후기 읍성(邑城)이자 수영성(水營城).
건립 경위

교동읍성의 축성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정묘호란을 겪은 뒤 강화도의 방비를 위해 1629년(인조 7)에 남양부 화량에 있던 경기 수영을 교동으로 이설하면서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교동현이 도호부로 승격되며 경기수사가 교동부사를 겸하게 하면서 화개산 북쪽에 있던 교동의 관아가 이곳으로 이전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633년(인조 11)에 경기 수영이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으로 확대 · 개편되면서 교동읍성은 통어영의 본거지가 되었다.

변천

교동읍성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주1이 이루어졌다. 1753년(영조 29)에 성곽과 주2을 고쳐 쌓았고, 1884년(고종 21)에 남문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이후 성벽은 허물어졌고 동문과 북문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921년 심한 폭풍우로 남문 주3가 훼손되었다. 1975년에 훼손된 남문과 인접 성벽에 대한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2018년에는 홍예만 남아 있던 남문의 육축부와 함께 문루를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복원하였다. 1974년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재지정되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2019년 남문 주변 성벽의 구조와 주6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남벽 체성의 축조 기법과 구조가 확인되었다. 남문 동쪽 구간의 지표 아래 약 2m에서 초축 당시의 성벽이 발견되었고 그 위로 2차례 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초축 성벽은 뻘층 위에 다짐을 하고 잡석을 깔아 기초부를 조성한 뒤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성벽을 안쪽으로 수직에 가깝게 들여 쌓았다. 초축 성벽은 기단을 포함하여 4단이 확인되며 0.5~1m 내외의 대형 자연 할석재를 이용하여 수평 줄눈 쌓기로 정교하게 쌓아서 만들었다. 1차 수축 성벽은 석재 크기가 초축 성벽에 비해 작고 조잡하게 만들어졌는데 영조 또는 고종 대에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2차 수축 성벽은 현재 지표 위에 주7로 조성한 것으로 1975년 보수 당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 서쪽 구간에서는 초축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다. 남문 앞에 있었던 옹성과 관련한 주8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후대에 훼손되어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와 특징

교동읍성은 주9에서 남쪽 해안가로 뻗어 내린 가지 능선의 말단부에 해당하는 완만한 구릉 위에 위치한다. 성벽은 구릉 지형을 따라 이어져 북서-남동 방향의 주11의 평면 형태를 이룬다. 둘레 430m, 면적 5,958.7㎡로 비교적 소규모 읍성에 해당한다. 성벽은 대부분은 허물어져 있고 민가의 담으로 활용되거나 경작지 조성으로 멸실되면서 원형을 잃었다. 북문지 일대 구간 성벽의 윤곽은 비교적 잘 확인되나 대부분 주4만 남아있다. 남문 동쪽과 서쪽 구간에는 막쌓기 방식으로 조성된 높이 1~2m 가량의 석축이 있지만 근현대에 수축된 것으로 파악된다. 성벽은 대체로 내탁 방식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옛 문헌과 지도에 의하면 교동읍성에는 옹성을 두른 동 · 남 · 북문 등 3개 문(루)이 있었고 주5해자도 존재하였다. 성문에는 문루가 있었는데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전한다. 이 가운데 동문과 북문, 치성과 해자는 자취가 사라졌고 현재 남문만 남아 있다. 남문은 주10으로 안쪽과 바깥쪽 기단석 위에 다듬은 10개의 석재를 곡면으로 쌓아 홍예를 이루었다. 성문 규모는 주12를 기준으로 폭 3.44m, 높이 3.85m, 길이 3.14m이다. 홍예석에는 ‘삼도통문(三道通門)’, ‘삼도대(三道大)’, ‘남루(南樓)’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성내에는 객사와 내 · 외아 등의 관아 건물, 각종 부속 건물과 창고, 안해루와 삼문루 등 누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중 안해루의 주13 2기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의의 및 평가

교동읍성은 삼도수군통어영의 본거지이면서 일반 읍성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 강화와 교동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보장처 강화도 및 도성 방어 체제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강도지(江都志)』
『여지도서(輿地圖書)』

단행본

『신편 강화사』(강화군군사편찬위원회, 2015)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강화교동읍성 정밀지표조사보고서』(강화군·인하대학교 박물관, 2007)
『강화 교동읍성 남문일대 복원정비 사업부지내 유적 시굴조사보고서』(강화군·한성문화재연구원, 2021)

인터넷 자료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https://portal.nrich.go.kr)
주석
주1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 우리말샘

주2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3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4

성이나 집, 담벼락 따위를 흙으로 쌓음. 또는 그렇게 쌓은 건축물. 우리말샘

주5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6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 우리말샘

주8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9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있는 산. 연봉 정상에 고려 시대의 봉수대 석축이 남아 있다. 높이는 259미터. 우리말샘

주10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우리말샘

주11

길이가 폭의 2배 이상으로 보통의 타원형보다 길며 양쪽의 긴 측면이 평행한 모양. 우리말샘

주12

열리는 부분. 우리말샘

주13

돌을 다듬어서 만든 기둥.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이희인(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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