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읍성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에 있는 조선 후기 읍성이자 수영성(水營城)이다. 1629년(인조 7)에 경기 수영이 남양에서 교동으로 이설되면서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영성과 일반 읍성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성으로 조선 후기 강화와 교동의 역사적 전개 양상 및 도성 방어 체계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교동읍성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수축이 이루어졌다. 1753년(영조 29)에 성곽과 여장을 고쳐 쌓았고, 1884년(고종 21)에 남문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이후 성벽은 허물어졌고 동문과 북문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921년 심한 폭풍우로 남문 문루가 훼손되었다. 1975년에 훼손된 남문과 인접 성벽에 대한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2018년에는 홍예만 남아 있던 남문의 육축부와 함께 문루를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복원하였다. 1974년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재지정되었다.
2019년 남문 주변 성벽의 구조와 옹성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남벽 체성의 축조 기법과 구조가 확인되었다. 남문 동쪽 구간의 지표 아래 약 2m에서 초축 당시의 성벽이 발견되었고 그 위로 2차례 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초축 성벽은 뻘층 위에 다짐을 하고 잡석을 깔아 기초부를 조성한 뒤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성벽을 안쪽으로 수직에 가깝게 들여 쌓았다. 초축 성벽은 기단을 포함하여 4단이 확인되며 0.5~1m 내외의 대형 자연 할석재를 이용하여 수평 줄눈 쌓기로 정교하게 쌓아서 만들었다. 1차 수축 성벽은 석재 크기가 초축 성벽에 비해 작고 조잡하게 만들어졌는데 영조 또는 고종 대에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2차 수축 성벽은 현재 지표 위에 막쌓기로 조성한 것으로 1975년 보수 당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 서쪽 구간에서는 초축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다. 남문 앞에 있었던 옹성과 관련한 유구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후대에 훼손되어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동읍성은 화개산에서 남쪽 해안가로 뻗어 내린 가지 능선의 말단부에 해당하는 완만한 구릉 위에 위치한다. 성벽은 구릉 지형을 따라 이어져 북서-남동 방향의 장타원형의 평면 형태를 이룬다. 둘레 430m, 면적 5,958.7㎡로 비교적 소규모 읍성에 해당한다. 성벽은 대부분은 허물어져 있고 민가의 담으로 활용되거나 경작지 조성으로 멸실되면서 원형을 잃었다. 북문지 일대 구간 성벽의 윤곽은 비교적 잘 확인되나 대부분 토축만 남아있다. 남문 동쪽과 서쪽 구간에는 막쌓기 방식으로 조성된 높이 1~2m 가량의 석축이 있지만 근현대에 수축된 것으로 파악된다. 성벽은 대체로 내탁 방식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옛 문헌과 지도에 의하면 교동읍성에는 옹성을 두른 동 · 남 · 북문 등 3개 문(루)이 있었고 치성과 해자도 존재하였다. 성문에는 문루가 있었는데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전한다. 이 가운데 동문과 북문, 치성과 해자는 자취가 사라졌고 현재 남문만 남아 있다. 남문은 홍예문으로 안쪽과 바깥쪽 기단석 위에 다듬은 10개의 석재를 곡면으로 쌓아 홍예를 이루었다. 성문 규모는 개구부를 기준으로 폭 3.44m, 높이 3.85m, 길이 3.14m이다. 홍예석에는 ‘삼도통문(三道通門)’, ‘삼도대(三道大)’, ‘남루(南樓)’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성내에는 객사와 내 · 외아 등의 관아 건물, 각종 부속 건물과 창고, 안해루와 삼문루 등 누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중 안해루의 석주 2기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교동읍성은 삼도수군통어영의 본거지이면서 일반 읍성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 강화와 교동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보장처 강화도 및 도성 방어 체제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