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성은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에 있는 조선 후기 산성이다. 1694년(숙종 20)에 왕실 보장처 강화도의 방비를 위해 쌓았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문수산 정상부에서는 삼국~통일신라시대에 쌓이고 운영된 성벽이 발굴되어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곳이 군사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문수산성은 왕실의 보장처인 강화도 방어를 위해 1694년(숙종 20)에 삼군문(三軍門)을 동원하여 쌓은 것이다. 효종~ 숙종 재위 기간 동안 강화도 연안을 따라 다수의 진(鎭) · 보(堡)를 배치하였고, 이후 돈대와 외성을 차례로 쌓아 섬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여기에 병자호란 당시 강화 갑곶 건너편이 청군의 강화도 공격에 발판이 되었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문수산에 산성을 쌓아 내륙으로부터 강화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관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1718년(숙종 44)에 산성 내에 문수진(文殊鎭)을 설치하였다. 이후 영조~ 순조 재위 기간 동안에 여러 차례 무너진 성벽, 성문 그리고 문루를 수축 및 보수하였다.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부를 함락하자 순무초관(巡撫哨官) 한성근(韓聖根)이 지휘하는 조선군 50여 명이 문수산성에 진입하여 내륙 방향으로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남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하였다. 이때 성내 민가와 남문 및 주변 성벽이 파괴되었다. 병인양요 직후 산성을 중건하였으나 이후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면서 원형을 잃었다.
문수산성은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대 이후 파괴되었던 북문과 남문, 장대지가 복원되었고 성벽에 대한 보수가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11년 문수산성에서 김포 문수산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문수산성은 1995년부터 2021년까지 9차례에 걸쳐 시 ·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멸실된 산성 서벽 구간과 문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성벽의 축조 기법과 서문 및 아문지가 확인되었다.
정상부에 위치한 장대지도 발굴 후 복원이 이루어졌다. 장대지 남쪽 아래 지점에서는 삼국시대 성벽과 추정 치(雉)가 확인되었는데 산 정상부를 따라 둘레 약 300m의 테뫼식 산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삼국시대 성벽은 바른 층 쌓기로 쌓았으며 대체적으로 높이가 낮은 외벽을 내벽 높이까지 쌓아 올린 뒤 내 · 외벽을 동시에 쌓았다. 출토 유물로 보아 이 테뫼식 산성은 삼국~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수산성은 문수산의 남북 방향으로 형성된 주능선과 여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2개의 가지 능선, 서쪽 해안선을 따라 성벽이 만들어졌다. 성 안쪽으로 동서 방향으로 뻗은 능선과 이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형성된 2개의 계곡을 감싸는 고로봉식 산성이다. 둘레는 약 6.2km이다.
성벽은 전 구간이 석축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강화 해협과 접해 있는 서벽은 남아 있지 않다. 능선 구간의 성벽은 내탁식으로 만들어졌고 유실된 서쪽 구간 중 문지 주변은 협축 방식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 · 남 · 북 벽은 암반을 정지하고 수평을 맞춘 뒤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거친 성돌을 허튼층쌓기로 축조하였다. 성돌은 대체로 문수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역암이 사용되었다. 일부 구간에는 여장(女墻)이 남아 있으며 성돌에 축성 담당 및 축성 구간을 표기한 명문석이 여러 개 확인되었다.
산성에는 서 · 남 · 북 3개의 대문과 소규모 출입 시설인 아문(亞門) 4개소가 있었다. 대문 가운데 남문과 북문이 복원 정비되어 있고 서문(공해루)은 멸실되었다. 서문지 앞에는 문수산성과 강화 진해루 사이를 잇던 갑곶 나루 선착장 석축로가 남아 있다. 아문은 능선 구간 성벽에 2개소가 남아 있는데 이 중 남아문의 성내는 방형이며 바깥쪽은 홍예식이다. 이밖에 남벽에 용도(甬道)가 3곳 있다.
문수산 정상에는 할석으로 성벽을 축조한 둘레 약 70m의 원형 장대지가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는 문수산의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전하는 문수사(文殊寺)가 자리한다.
문수산성은 돈대, 강화외성, 강화산성과 함께 강화도 방비를 위한 주요 군사 시설 가운데 하나이며,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다. 문수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 성벽이 발굴되어 조선시대 이전부터 문수산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